한국의 노조 운동이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한가하게 운동론 타령이나 할 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번 호에서는 예정대로 조직체제 얘기를 해보려 한다.
노동조합의 조직체제란 사업장, 산업, 지역, 전국 조직 간의 역할분담과 협력의 체제이고 의사결정과 규율의 체제이다. 노동조합의 힘은 1차로는 조합원 수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힘을 효율적·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은 조직체제나 전략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노조 운동의 효율·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조직확대 문제뿐만 아니라 조직체제 문제도 검토해봐야 한다.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의 조직체제는 마음먹은 대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체제는 권한과 재정을 배분하는 일에도 관계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득권 같은 것이 걸려있기 마련이다. ‘합리성’이 규범으로 통하는 곳에서는 조직체제 변경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겉돌게 될 수 있다.
노동조합 조직체제, 실사구시적 검토의 필요성
조직을 바라보는 시각은 나라마다 다른 것 같다. 조직을 ‘수단’으로 보는 곳도 있고, ‘목적’처럼 보는 곳도 있다. 선진국 노조들의 경우는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조직통합을 쉽게 이루어내고 있다. 전형적으로 기업별 체제 국가인 일본도 비슷하다. 조직통합을 잘 이루어내는 편이다. 물론 조직통합은 조직체제 변경보다는 기득권을 덜 건드릴 것이라는 요인은 있다.
어떻든 조직 변경이 필요할 때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조직은 불가불 비효율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조직체제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조직체제든 장점만 있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서구식의 산별 체제가 장점만 있는 그런 것인 것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지만, 세상에 그런 만병통치약은 있을 수 없다.
필자는 과거 영국의 AEEU라는 산별노조 사업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느낀 산별 체제는 ‘장점 반 단점 반’의 그런 것이었다. 산별노조 본부는 강하겠지만 사업장 조직은 생각 이상으로 취약해 보였다. 우선 간부라는 분들이 별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사용자와 맞서 상대할 체급이 아닌 듯했다. 교섭권이 산별노조에 있고 사업장은 고충 처리 정도나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직체제의 단점 측면을 보완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물론 기회가 오면, 산별 전환과 같은 큰 그림을 그려나갈 수도 있다고 본다. 한국의 노조 운동은 오랜 기간 산별 전환을 거의 맹신적 수준에서 소망해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98년 무렵부터였다. 강제적 구조조정이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의 반노동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성공한 곳은 리더십이 강한 소수뿐이었다.
나머지는 중도 하차했고 이후로는 전반적인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물론 통계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전국노동조합조직현황』에 따르면 전체 조직노동자 중 산별노조, 지역별·업종별 노조 등 초기업노조 소속의 비중이 2020년 현재 60.4%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이미 기업별 체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긍하기 어려운 수치인 것 같다.
노동조합 조직체제의 과거와 오늘
이 지점에서 필자는 산별 전환 추진이 좀 더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1990년대 초반 무렵이 더 적기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당시는 노조 운동이 정권과 자본에 대적할 힘이 있었고, 노동운동의 대의가 보편적 규범으로 먹힐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신생조직의 경우는 기업별 체제적 기득권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기존조직이라 하더라도 노조 운동의 대의를 거스르기 어려웠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의 노조들도 유사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산별 전환 결의나 담론이 내걸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류의 흐름을 만들지는 못했다. 제2 노총 건설 문제가 우선적이어서였을 것이다.
어떻든 당시 산별 전환을 이루어냈다면 그 이후의 노조 운동은 지금과는 다른 경로를 갔을 것이다. 우선 당장 중소노조들이 대거 해산되는 것을 상당 정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에 50만 명 정도의 조합원 수 감소가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조합원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소영세 노조 조직화에 있어서 산별 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1960∼70년대의 조직화 경험에서 입증된 바 있었다. 60∼70년대의 산별노조는 ‘민주노조’ 진영으로부터 ‘절름발이 산별’로 평가절하되기도 했지만 그런 산별마저 기업별 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조직화 성과를 냈다. 1962년에 20만 명 미만의 한국노총 조합원 수가 1972년에는 50만 명을 넘어섰고, 1978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었다. 산별 체제가 밑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별 및 지역 차원의 조직체제 개선 과제
필자는 이런 문제가 옛날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용노동부의 『2021년 전국노동조합조직현황』에 따르면 30인 미만 사업장의 조직률은 0.2%이고, 100인 미만 사업장의 조직률은 0.9%에 불과하다. 조직률 10%가 낮다고 생각하지만, 중소 사업장은 그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의 노조 운동은 고질적인 저 조직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동네 빵집이나 철공소 같은 곳이 조직되지 않는 한 선진국형 노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소영세 사업장 조직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역 산별과 같은 것이 건설되어 밀착해서 지원해야 한다. 산별 연맹에 따라서는 근래 들어 전국일반노조 형태의 노조를 결성하여 일단 하청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이 자생력 있는 조직을 꾸릴 때까지 연맹 본부가 인큐베이팅하고 있다. 진일보한 조직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별 노조를 주축으로 하는 개념인 것 같다. 현재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은 일정 규모 이하의 신규조직을 지역노조로 편재하거나 기존조직 일부까지 지역노조로 아우르는 그런 것이다.
필자는 후자의 방안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1960∼70년대의 산별 체제에서도 주요 산별노조들이 그런 조직형태를 취했었다. 물론 기존조직의 반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나 대공장노조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산별 건설보다 용이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물론 그런 지역 산별 전환이 불가능하다면 전자의 방안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마저도 잘 되기 어렵다면 현존의 지역본부나 지역협의회와 같은 조직을 강화해보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지역본부나 지역협의회와 같은 지역조직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지역조직 강화 문제는 중소노조 결성 측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역조직은 단사 조직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일선 조직이다. 전국 조직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허리조직인 것이다. 그러나 근로시간 면제제가 도입되면서부터 그러한 역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역조직에 상근 활동가를 충원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지역조직에 따라서는 단사 조직 행사 참여나 문제 사업장 밀착지원을 충분히 하기 어렵다.
결국, 단사 조직 스스로 지역조직을 찾지 않는 한 지역조직과 단사 간의 연결고리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조직에 후미진 사각지대가 생기게 될 것이다. 이제 기업별 체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나빠지는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재정문제가 걸려있어서일 것이다. 알고도 죽는 해수병이랄까. 어떻든 작은 것일지라도 무언가 해보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 같다.
노총 차원의 조직체제 개선 과제
끝으로 노총 차원의 조직체제 개선 문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두 가지 부문을 얘기하고 싶다.
첫째로 조직확대를 위해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느냐, 아니면 가입조건을 두어 조직이 일정한 질서의 틀을 갖도록 하느냐이다. 한국노총은 후자의 편이었다. 창립부터 민주노총 창립까지는 전산업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나머지를 연합노련의 관할권으로 하는 체제를 취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설립 이후 조직경쟁이 격화되면서, 그리고 법원에서 병원노련이나 언론노련 등이 소송을 통해 합법성을 획득하면서 정책을 바꾸어 갔다. 규약규정은 그대로 유지하되 신규 산별 조직을 받아들이는 방향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비정규직과 초산별 노동자가 증가하자 이들의 가입을 촉진하기 위한 규약개정도 하였다. 1만 명 미만의 조직들에 대해 회원조합이 아닌, 노총 직할의 전국적 직업별 노조나 일반노조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대체로 기존 조직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개방하려는 입장이었다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조직확대가 부분적으로 덜 촉진될 가능성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맹조직들 스스로가 조직통합 등을 통해 조직의 틀을 합리화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노총의 역할이 대 정치권 교섭에 집중되도록 하는 문제이다. 한국노총의 경우는 역할영역이 매우 광범하고 경계도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산별 연맹도 사정은 비슷하다. 상급조직을 단사 노조의 지원체로 하려는 구심력이 매우 강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상급조직은 사실상 무한책임을 지게 되어있다. 다다익선일 수는 있겠지만 상급조직의 고유 역할 집중을 저해할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정권이 노사관계를 좌지우지하던 그런 시기에는 단사 노조의 유지나 노사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총의 대정부 역할이 중요했었다. 지금도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간의 규제 완화로 정부가 단사 노사관계에 개입할 수 있는 폭과 깊이는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노총이 대 정치권 교섭에 더 독자성을 가지고 집중해갈 수 있도록 방향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산별 조직의 역량 강화가 전제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선진국 노총이 대 정치권 교섭에 주력할 수 있는 것은 산별노조가 대 사용자 관계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별 체제라는 조직형태와 대 산별로의 통합능력이 그런 책임분담 체제를 가능케 한 것이다.
한국노총도 산별 강화를 위해 중소 산별 통합의 조직혁신 방안을 내기도 하고 제조, 공공, 금융, 운수, 연합·서비스 등 5개 산업 별협의회 설치를 규약과 규정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필자도 한국퇴직자총연합이 2021년도에 출판하여 배부한 『노동운동 제언』이라는 책자에서 산별 연맹들을 제조부문, 운수부문, 공공부문, 서비스부문과 같이 대 산별 단위로 묶어 그 단위의 역할을 상설화할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 산업정책 참여의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판단에서였다. 산별 조직들도 대 산별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기존 산별 개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필자는 산업별 협의회의 역할과 권한, 위상을 공식화하고 상설화하는 것이 실천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산이 수반되는 문제라 어려울 수는 않겠지만 노총과 산별이 힘을 합하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선 작은 것이라도 시작해 보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