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는 그토록 화려한 인물에게도 그처럼 가혹한 순간을 안긴다. 승부를 내야 하는 물러설 수 없는 무대에 서서, 주인공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인물이 무심한 세상의 면면들과 가차 없는 성찰을 마주하게 된다.
다양한 인물들에게 입체적인 성격이 부여되기에 우리가 마음을 주고 감정 이입하거나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하는 인물이 곳곳에 있다. 승부를 내야 하는 현실이 있고 그것을 감당하되, 그와는 다른 차원의 싸움이 <슬램덩크>의 세계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마치 우리의 삶에서 각자는 주인공일 수밖에 없고 저마다 물러설 수 없이 대결해야 하는 일들에 직면하는 것처럼, 그래서 인생에서 주인공으로서 환호하거나 오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만나는 것처럼 <슬램덩크>는 온 힘을 다해 잘 해내고 싶은 열정이 담긴 우리의 시간을 농구경기로 재현한다.
그러니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인생의 묘미를 새기는 일이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만화에는 없는 부분으로 영화에서는 송태섭의 과거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원작에서 송태섭은 서태웅과 강백호의 두 주인공 성장기 옆에서 주로 감초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송태섭 역시 그저 기능적으로 쓰이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잠재적으로는 주인공 역할을 품고 있었겠다. 그런데 왜 송태섭이 부각하고 있는 것일까? 더 화려한 플레이와 좋은 피지컬, 잘생긴 얼굴을 가진 다른 많은 이들이 있는데 말이다.
영화 초반에 송태섭이 오키나와 출신이란 것이 밝혀진다. 오키나와는 일본 정부와 미군정에 강제로 귀속되어야 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주민 대량 학살을 겪기도 한 곳으로 제국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깊은 폭력과 차별을 겪었다.
송태섭은 상대적으로 주변부 캐릭터인 데다가 역사적으로 소외된 지역 출신이다. 더불어 그는 농구선수로서는 신장이 작다는 핸디캡 또한 안고 있다. 송태섭은 <슬램덩크> 세계에서 마이너리티다. 송태섭이 중심에 서자,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걸고 대결하는 <슬램덩크>의 세계가 또 다르게 보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는 면면들이 승부의 흐름을 바꾸는 드라마를 통해 더욱 짜릿한 영광의 순간을 만든다. 마이너리티를 중심에 둔 2023년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성숙해진 것이라고 해도 좋을까.
하지만 그에게 부여된 서사의 내용은 다소 상투적인 전개이지 않은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송태섭에게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던 농구 유망주 형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슬램덩크>에서 구체적으로 깊은 과거 사연이 주어진 정대만의 경우에도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서 안 감독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슬램덩크>의 인물들은 경기를 압도하는 사연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품은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새로 소개된 송태섭의 이야기는 종종 경기보다 앞서거나 무거워질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비중 있게 전개된다.
성장은 아버지의 부재를 생각하며 그 빈 자리를 자신이 대체해 어머니와 가족을 보호하는 주체가 되기를 꿈꾸면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데 송태섭은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에 형을 언급하던 것을 삭제하고 그저 자신에게 농구를 허락해줘서 고맙다고만 쓴다. 스스로에 남아있는 그림자, 그 그림자와의 비교와 그 앞에서의 죄책감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으로 동기화해 감사 인사를 전한다.
무엇보다 무수한 상실의 역사를 짊어진 오키나와를 정체성으로 품고 있는 송태섭은 “강했고, 무서웠다”고 회상한 산왕 고교와의 경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임한다.
<슬램덩크>의 힘,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뛰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는 그 힘은 무엇보다도, 대결해야 할 대상 앞에 선 시간에 물러서지 않고 기꺼이 덤벼 온 힘을 다해서 이기거나 지면서 모두 영광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에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감정을 소모하고 눈의 피로가 극대화되는 스펙터클에 노출된 우리에게 화려한 CG로는 도달할 수 없는 몸의 액션을 선보인다.
스크린에서는 후각이나 촉각을 직접 느낄 수 없으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어쩐지 건강한 땀 냄새를 풍기고 신체의 후끈한 열기를 전달한다.
진심을 다 넣은 열정과 그 일을 향해 주저 없이 가는 간결한 움직임을 통해 영광의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우리는 <슬램덩크>를 통해 그러한 인생이라는 운동을 환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