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잘 일어나는 편이고, 주 3회 정도 출근 전에 운동을 가다 보니 가끔 ‘갓생사네'라는 말을 듣는다. 여기서 갓생(god+生)은 매우 모범적이고 존경받을 만큼 열심히 사는 삶을 뜻하는 신조어다. 일반적으로 커리어, 건강, 취미 등 무엇하나 빠짐없이 모든 분야를 성실하게 해내야 ‘갓생’으로 불릴 자격이 생긴다. 많은 갓생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책 읽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취미생활을 하거나 공부한다. 이 와중에 재테크도 하고 N잡도 하고 잘 놀기까지 한다.
god의 삶을 사는, 자기관리 끝판왕인 이들은 천상계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 존재한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 SNS에 자신의 갓생을 증명하고, 나도 했으니 이걸 보는 당신도 할 수 있다며 각종 팁을 전수한다. 팁의 대부분은 생산성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을 얼마나 짜임새 있고 알차게 사용하느냐, 즉 생산성 향상이야말로 다양한 목표와 이를 위한 수많은 할 일을 해내기 위한 핵심 조건이 된다.
자기관리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방안은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전문가들로 인해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뇌과학이 강력한 지원군으로 등장했다. 개인적인 경험, 사례의 나열을 넘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뒷받침하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뇌과학을 내세우는 자기계발서도 많아졌다. 아래는 유튜브에서 뇌과학 관련 인기 동영상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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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영상대로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자기관리를 하며 갓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삶도 레벨업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차서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현타가 왔다. 30대가 되어서도 최적화 방안을 찾고 있다니.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엔 늦어도 30대 초반이 넘어가면 생활이 안정된 어른이 되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당시의 예상과 너무 동떨어진 지금의 내 모습을 새삼 깨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청년은 지금의 삶도, 미래도 모두 불안하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라 일상적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N잡을 고민한다. 집값과 물가 모두 상상 초월로 치솟지만, 수입은 제자리 혹은 마이너스다.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가지만 사회의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 갓생에서 ‘열심히 사는’ 영역은 자기 일상의 관리에 한정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서글픈 현실을 마주한다. 일상이 이렇게까지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는 건, 일상마저 무너진 채로 살아가는 게 보편적인 거라는 말이기도 하니까. 취업 준비에 매진하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병행해야 하는 취준생에게,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당하더라도 과중한 업무를 떠안은 이들에게, 매일 출퇴근으로 3시간 넘게 길바닥에 시간과 에너지를 버리는 장거리 출퇴근러에게, 살벌한 정글에 내던져진 자영업자에게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란 꿈과 같은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처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더 생산성 향상에 집착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표현하면 ‘뇌과학으로도 증명된 방법들을 활용해서 열심히 자기 관리하면 갓생을 살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해보자'는 말. 그래서 오늘도 나는 갓생 담론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쓴다.
덧. 지난 16일,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19살 청년 노동자의 메모장에 적힌 빼곡한 목표와 그에 따른 계획들은 ‘갓생’ 그 자체였다. 꿈 많고 열정적인 청년은 지난달 50시간에 이르는 연장근무를 했고, 사고를 당했을 때 2인 1조 작업수칙이 지켜지지 않아 1시간 가까이 방치되어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일하다 숨진 하청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이 여전히 반복되는 세상 앞에서 갓생이 무슨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