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숙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1990년대 후반 미국 텍사스의 어느 전광판(billboard)에 인상적인 내용이 걸렸다. 한 여성이 살해당했는데 해당 경찰들이 그 범죄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수사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아일랜드계 영국인 감독 마틴 맥도나는 우연히 그 지역을 지나다 전광판을 보게 되어 그것을 설치한 이가 피해자의 어머니일 거라고 추측했고, 이는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쓰리 빌보드>(2017)의 모티프가 되었다.
밀드레드는 7개월이 지나도록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고 관심 밖으로 멀어진 딸 안젤라의 강간 치사를 부각하는 묘안을 짜낸다. 그녀는 도로를 따라 차례로 설치된 세 개의 전광판에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문장을 순서대로 붙인다. “죽어가면서 강간당함”, “아직 체포하지 못했다고?”, “어째서죠, 윌러비 서장?”
밀드레드가 익명의 대상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는 ‘미투(#metoo)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미투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SNS에 그 경험을 공개하면서 사회에 만연한 위력, 차별, 혐오 등으로 인해 문제가 은폐되는 현실을 공중(公衆)에 고발하고 그 행동에 사람들이 ‘#미투’라고 응원과 지지를 보낸 데서 정착된 표현이다.
좀 더 폭넓게는 사회적 위계 관계로 인해 가해자를 문책하기 힘든 위치에 선 이들이 그 억압된 상황을 돌파하고자 공개적으로 여론을 도모하는 정치적 운동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밀드레드의 전광판은 경찰서장을 대표로 호명하여 공권력에 항의하고 여론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미투와 연결된다.
여기서 미투는 성폭력 범죄와 태만한 경찰 조직 문제를 공유하고 사회 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힘을 더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밀드레드가 미궁에 빠진 사건의 범인을 잡아 처벌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다면 그와 관련된 행위는 무력함에 닿게 될 것이다.
가해자의 자리는 텅 비어 있고 거기로 향하는 길 역시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딸과 엄마의 서로를 향한 마지막 기억은 마치 이어질 사건을 예고한 것 같은 험한 말을 엄마가 딸에게 퍼부은 다툼이다. 이런 현실을 해결하거나 극복할 방법을 손에 쥘 수 있을까?
미해결 강간 치사를 둘러싼 비극적 현실의 중심에는 무력함과 이에서 비롯된 좌절감이 자리하고 있다.
<쓰리 빌보드>는 부당한 일을 견뎌야 하는 상황에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지 못하고, 그 상황을 벗어날 해법도 보이지 않는데, 공적으로나 주변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단이나 방법이 없는 불통의 세계가 떠오르게 한다.
이는 공동체의 작동을 기대하지 않고 제각기 알아서 살아나갈 방법을 꾀하는 것을 지칭하는 ‘각자도생’이란 말을 ‘웃프게’ 적절한 현실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세태를 낳는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위와 같은 불통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들이 어떻게 해소되지 못한 좌절감과 무력감과 분노 등의 감정을 사회구성원 사이의 반목과 갈등, 혐오로 전이하고 급기야 자력 구제의 복수극의 시작점에 서는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윌러비 서장을 따르는 경찰관 딕슨은 이러한 세계의 중심에 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호모포비아인 엄마의 영향에서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심리적 괴리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손쉽게 폭력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잘못된 분노와 슬픔을 거둬들이기는커녕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그는 전광판의 문구를 성찰하기보다는 밀드레드를 향한 복수심에 사소한 이유로 그녀의 동료를 체포하기도 한다. 불통의 세계 한복판에 선 밀드레드와 딕슨은 점점 더 범인의 체포라는 공통의 과제, 그리고 각각 딸을 잃은 슬픔과 서장을 잃는 슬픔을 직시하는 데서 벗어나 서로에게 화살을 돌린다.
각자도생하는 고립된 개인의 발버둥은 서로를 미워하는 데서 해법을 찾는 길로 향하고 만다.
불통의 세계에 기인하여 잘못된 방향에 놓인 화살은 여론을 형성하는 다수에게서도 발생한다. 익명으로 공개된 메시지의 잠재적인 수신자는 위계를 무너뜨리는 근본적이고 가장 강한 민주적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온갖 종류의 왜곡된 반응을 낳는 자의식적인 힘을 낳을 수도 있다.
밀드레드의 전광판 설치는 그 성격에 대한 적절한 지지 혹은 비판보다는 병으로 곧 생을 마감할 윌러비라는 이웃, 친구, 동료에 대한 주변의 동정심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중에는 윌러비와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낯선 이의 까닭 없는 분노와 폭력도 존재한다.
우리가 때때로 인터넷 댓글에서 마치 사람들이 그냥 화내고 싶은 마음을 분출한 것 같은 소위 ‘억까(억지로 까다)’와 같은 반응이 밀드레드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밀드레드의 행동을 다독여준 유일한 이는 윌러비인데, 그는 전쟁에 뛰어드는 대신 편지라는 지극히 내밀한 소통 방식을 택한다. 윌러드는 마치 유언처럼 세 통의 편지를 남겨서 아내에게는 사랑의, 밀드레드에게는 이해와 유머의, 동료 경찰에게는 공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는 불통의 시대에 잘못된 대상을 향한 혐오, 차별, 폭력으로 이전되는 인물들의 행위에 제동을 건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서장의 편지 말고도 그들의 복수심을 내려놓는 데 참조될 만한 해법을 보이는 주변부 존재들과 마주친다. 그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딕슨은 사랑하는 서장을 잃은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전광판 대여 담당 직원 레드를 찾아가 심한 폭력을 가하는데 이는 잘못된 대상을 향한 보복이지 않은가.
딕슨도 밀드레드의 잘못된 보복의 대상이 되어 큰 부상을 당해 레드와 같은 병동에 들어가게 된다. 놀랍게도 레드는 차오르는 감정을 힘겹게 억누르고 딕슨에게 오렌지주스를 건넨다. 어긋난 미움의 연쇄로서의 보복 대신 어려움을 위로하는 주스를 돌려줌으로써 레드는 서로를 주인공으로 한 복수극 말고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서장의 편지와 레드의 주스를 받으면서 딕슨은 밀드레드를 향한 보복 대신 범인의 체포라는 본래 과제에 집중하여 밀드레드와 힘을 합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사로잡은 공통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는, 즉 안젤라를 해친 자를 찾을 수 없는 무력감 앞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해당 가해자는 아니지만 나쁜 놈이라고 확신하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다시 말해 정확한 복수의 대상 대신 어쨌든 나쁜 놈이라고 생각되는 이를 제물로 세워 복수극을 시작하고자 한다.
밀드레드의 말처럼 그것은 “가면서 결정”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잘못된 수신자를 향한 미움을 거두는 주변인들과 마주쳐왔고 그들의 얼굴은 이제 침착하고 생각에 잠겨있다. 그래서 어쩐지 그들은 복수극을 실행하지 않을 것 같지만, 모를 일이다.
영화 속의 윌러비, 레드, 난쟁이, 사슴 등에 이어, 각자도생과 자력 구제의 논리가 통하는 복수극과는 다른 공동체의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우리 사회가 보여줄 수 없다면 밀드레드와 딕슨의 여정은 다시 복수극으로 열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