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요구를 30년 넘게 외쳐온 집회가 있다. 세계에서 단일 주제로 열린 집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노총은 지난 2019년까지 1년에 1회 수요시위를 주관해 왔다. 코로나 19 유행 이후 중단된 수요시위가 다시 시작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더는 수요시위를 개최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았고 지난 10월 16일, 제1670차를 맞이한 수요시위를 한국노총과 한국노총 여성위원회가 다시 주관했다.
▲ 제1670차 수요시위(2024.10.16.)
베를린 미테구에 세워진 소녀상, ‘아리(ARI)’가 위험하다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를 가득 메운 제1670차 수요시위에서 우리는 “인권과 평화의 상징 아리(ARI)”를 지켜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쳤다.
‘아리’는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소녀상의 이름이다. 2020년 설치된 ‘아리’가 불과 4년 만에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허가 기간 만료를 이유로 베를린시가 10월 31일까지 ‘아리’의 철거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실 ‘아리’는 설치된 지 2주 만에도 철거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본 정부의 항의 때문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베를린시가 일본의 압박과 로비에 굴복한 결과이다.
미국, 유럽, 호주 등 전 세계에 32개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역사지우기에 온 힘을 쏟는 일본의 외교로 인해 설치 후 철거된 소녀상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많다. 지난해에는 독일 카셀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소녀상 ‘누진(Nujin)’이 철거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리’의 철거는 그저 하나의 동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호해야 할 인권과 평화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 ‘아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기억함으로써 비극적 역사를 절대 되풀이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평화와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역사적 다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리’를 지키는 일에 우리 국민뿐 아니라 베를린 시민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시민들, 시민사회, 정치권까지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뒷짐만 지고 있는 정부는 이번에도 이를 민간의 문제로 치부하고 침묵하고 있다. 피해국의 이런 미온적인 태도, 저자세 외교가 계속되는 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지우기는 계속될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가?
일본에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란 말인가.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전쟁범죄 역사에 대해 ‘한국의 일방적 입장’ 또는 ‘이미 한일 간 합의를 통해 끝난 일’이라며 독일을 비롯한 국제 사회를 호도하고,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통해 과거를 가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전쟁범죄의 가해자로서 일본이 해야 할 일은 진정한 반성과 사과, 배상이지 역사 정의 퇴행에 앞장서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얼마 남아 계시지 않고 얼마의 시간이 그들을 더 기다려줄지 알 수 없다. ‘아리’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뒤로 가는 역사 정의를 되돌리기 위해 일본과 한국 양국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첫째, 일본이 국제사회 호도와 압박을 멈추고,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와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 역사를 외면한 채 사죄하지도, 배상하지도 않는다고 해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가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둘째, 한국이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상처 치유와 명예 회복을 위해 대일 굴종 외교를 중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치부하거나 아예 없었던 일로 부정하기도 한다.
역사적 진실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는 절대 묵과할 수 없다. ‘아리’의 정부 대한민국은 뒤틀린 역사 인식을 바로잡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역사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아울러 독일은 평화와 인권의 상징 ‘아리’의 철거 강행을 당장 중단하고 영구 존치해야 한다. 전범으로서 독일이 일본과 다른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꾸준히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 독일이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가리려는 일본의 로비와 압박에 굴복, 동조한다면 일본과 한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아리’를 지키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나선 한국노총
한국노총은 지난 9월 11일, 정의기억연대, 민주노총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아리’의 존치를 촉구하는 한국-독일 노동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평화의 소녀상 ‘아리’를 지킴으로써 전쟁의 희생자가 된 여성의 고통을 기억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 달여 뒤에 열린 제1670차 수요시위에서 정연실 한국노총 상임부위원장은 “소녀상을 없앤다고 해서 범죄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은 반성하고, 사과하며,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 가려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역설하며, 독일 소녀상 ‘아리’의 영구 존치를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여성의 인권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앞장서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연대 발언에 나선 은선심 한국노총 서울지역본부 부의장 역시 “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인 독일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있어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한국과 일본이 이웃 나라로서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전향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 촉구하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함께 연대할 것을 약속했다.
가족을 잃고, 꿈을 잃고, 전부를 잃어야 했던 수많은 ‘아리’들 중 현재 생존해 있는 피해자는 고작 8명뿐이며, 이들 중 대부분도 병세가 위독하다고 한다. 기다릴 시간이 없다. 진정 어린 사과와 당연한 법적 배상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한국노총은 결코 ‘아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설치된 소녀상은 영원히 존치되어야 한다. 아니 더욱 많은 소녀상이 설치되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세대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과거라 하더라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의 시작이자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으로의 발돋움이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여전히 끔찍한 전쟁과 전시 성폭력이 되풀이되고 있는 세상을 멈출 우리의 역사적 책무, 아니 숙명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