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약
이 글은 생산현장에서 중대재해를 줄여야 하는 한국 사회의 그동안 노력과 한계를 검토하고, 향후 개선방향을 제안하고 있다.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 제정 이후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이 향상되는데는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하지만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에 정부에서도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통해 중장기적인 대응 원칙과 구체적인 대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사업장 산재예방의 원칙으로 ‘자기 규율’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 그리고 현장성과 혁신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책에서는 또다시 명령지시적 규율로 회귀하고 있으며, 혁신성의 원칙은 실종되고 기존의 현상적인 원인 제거에만 급급한 두더지잡기식 대책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산재유형에 기반한 ‘일반적인(general) 예방대책’과 사회구조 및 환경변화 등의 ‘특수성을 고려한(special) 예방대책’이 병행될 때 혁신적인 예방대책이 나올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안전보건영역의 배타적인 영역 확보 및 노사참여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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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문제제기
한국의 산업안전보건시스템은 1964년 산재보험제도의 시행과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제정으로 산업재해 보상과 예방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본격적인 경제성장 과정에서 산업재해를 일종의 불가피한 희생으로 인식했었다. 이러다 보니 생산 현장 노동자들의 희생에 대해서 산재보험으로 보상하는 대신, 산재예방을 위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1981년 산안법 제정 이후에는 안전보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사업장의 직접적인 위험요인들을 제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후반 문송면 수은중독 사건, 원진레이온 이산화황 중독 문제 등 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서도 노동운동과 연대한 진보적인 의료 전문가들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산재예방 노력들로 1981년 제정 산안법의 한계를 개선하기 위해 1990년 첫 번째 산안법 전부개정이 있었다1). 이후 한국의 산업재해율, 특히 산재사고 사망률은 1990년 이후 1998년까지 급격히 감소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로 감소폭이 둔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 차원에서도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산재예방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위험기계 기구 및 공정에 대한 안전작업 표준규칙, 유해 화학물질들에 대한 관리방안으로서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Material Safety Data Sheet) 등 구체적인 안전규정들을 마련한 점은 분명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중대재해(fatal injuries) 비율은 여전히 매우 높고, 특히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막을 수 있는 재래형 산재사망사고로 1년에 8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는 기존 산재예방 대책의 성과는 인정하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롭고 과감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시민사회의 제안 및 주도로 2021년 1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처법)을 제정하였고, 정부에서는 2022년 11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이하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중처법’과 ‘로드맵’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산재예방 노력에 대한 평가와 반성 하에서 새로운 원칙과 방향,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제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대재해 감소의 원칙과 세부적인 실천과제가 분리되어 중대재해 감축 성과가 제대로 나타날지 의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재해율 추이와 중대재해 추이를 검토하여 ‘로드맵’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로드맵’의 문제점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개선방향으로 중대재해 감축 원칙과 실천과제의 통일, 현장 노사가 자기규율의 ‘주체’로서 감축 방향의 수용성과 실행력을 높여야 한다는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Ⅱ. 한국의 재해율 및 중대재해 현황과 ‘로드맵’의 주요 내용
1. 한국의 재해율 추이 및 향후 과제
한국의 재해율은 1982년 3.98에서 1995년 0.99로 처음으로 재해율이 1 이하로 낮아졌다. 2000년대 이후로는 다소 변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의 재해율이 크게 낮아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최근 재해율이 다소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산재피해 노동자들이 과거에는 공상처리 등으로 산재가 은폐·미보고 되는 사례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산재은폐가 줄어들었고2), 또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특수형태근로종사자들도 산재보험의 혜택을 누리면서 재해율이 다소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재해율이 낮아지고, 산재보험 적용대상이 확대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은 선진국보다 낮다. 이는 재해율 지표가 아닌 산재사고 사망자수 추이에 대한 국제비교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별로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범위가 다르고, 중대재해가 아닌 산재 사고나 질병의 경우 산재보험을 통해 요양 및 치료를 받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실제 안전보건 선진국의 재해율이 한국보다 더 높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재해율만으로 각 국가별 산업안전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신 노동자들이 일을 하다가 생산현장에서 사망하는 중대재해는 반드시 막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재해율 지표의 한계로 ILO에서는 노동자 10만 명당 치명적 산업재해자 수(Fatal Occupational Injuries per 100,000 Workers)3)를 통해서 국가 간 비교를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 독일, 영국, 일본의 치명적 재해율을 확인해 본다. ILO 자료에서도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이 과거보다 향상되었음은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노동자 10만 명당 치명적 재해율은 1994년 34.1이었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18년 5.1, 2020년 4.6, 2021년 4.3까지 낮아졌다. 반면 한국에서 산업안전보건 선진국으로 자주 벤치마킹을 하고 있는 영국은 1990년대 초반 1.4 수준에서 더욱 낮아져 2000년대 이후로는 0.7~0.8 수준이다. 독일의 치명적 재해율은 199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높아졌으나 1994년 4.6을 기록한 이후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독일의 치명적 재해율은 2001년 3.0, 2008년 2.0으로 낮아졌고, 2016년 처음으로 1.0 아래로 낮아진 이후 2019년까지 0.7~0.8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2016년 이후 자료만 확인할 수 있는데, 2016년 2.0에서 2021년에는 1.5 수준이다. 한국은 2021년 치명적 재해율이 크게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4.3인데, 이러한 수치는 1990년대 중반 독일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4)
이와 같은 치명적 재해율에 대한 국가간 비교 결과를 통해서 한국의 10만 명당 치명적 재해율을 1점대로 낮추기 위한, 즉 중대재해로 인한 사고사망자수를 획기적으로 감소시켜야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이와 같은 중대재해 예방 노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2022년 11월 30일,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였다.
2. 한국의 중대재해 실태
이 절에서는 산재 사망사고자5) 특성을 중심으로 한국의 중대재해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고 ‘로드맵’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한다.
우선 반복적인 추락, 끼임과 같은 재래형 산재사망사고, 특히 이러한 산재가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 사회적인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사회전반적으로 안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일을 하다가 왜 노동자가 죽어야 하는가”, 나아가 “왜 동일한 유형의 사망사고들이 생산현장에서 반복되는가”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점증하고 있다. 건설업의 추락재해, 지하철 스크린도어 끼임 사망, 발전소·대형공장에서 기계설비에 끼여서 사망하는 등 소위 ‘재래형 산재’에 대해 국민들은 이제는 이런 사고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점에서 기업들도 이제는 ‘20세기 산업재해 감수성’으로 ‘21세기에 사업장 운영’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중대재해는 기업규모별·업종별 쏠림 현상이 확인된다. 기업규모로는 50인 미만 중소영세 사업장, 업종으로는 건설업과 제조업(특히 조선업, 철강업 등)에서 중대재해의 대부분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1998년과 비교하면 사고사망 재해의 50인 미만, 건설업과 제조업 집중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전체 노동자 중 건설업과 제조업 종사자 비중이 26.7%인데 반해 두 업종의 중대재해가 72.6%이며, 과거보다 제조업 비중은 약간 감소했으나 건설업의 중대재해 비중이 50%를 넘어서고 있다.
아울러 원청보다는 하청 부문의 중대재해,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및 특수형태 근로종사자의 중대재해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서는 기존의 ‘기업규모’나 ‘업종’ 차원의 분석과 대책마련 뿐만 아니라 ‘기업간 관계’나 ‘고용형태’, ‘플랫폼’ 등 새로운 변수를 통한 분석과 예방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6). 특히 한국에서는 사업장 내 위험요인을 원하청 관계 및 고용형태 차이를 활용해 산업재해 리스크를 전가(transfer)하려는 경향이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원하청 관계 혹은 고용형태에 주목해서 산업재해 감소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소위 ‘위험의 외주화’ 논의가 등장했다. 일례로 하청고용의 비중이 높은 조선업의 경우 사망사고의 ¾ 정도인 73%가 하청노동자인 것으로 정부에서도 추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조선업 중대재해 예방대책은 일반적인(general) 산재예방 대책과 하청부문의 특수성을 반영한(special) 산재예방 대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7)
3. 중대재해 로드맵의 주요 내용
정부에서는 지금까지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활동에 대해서 기업의 예방 체계 미비, 오히려 지나치게 방대하고 세세한 규정으로 인해 낮은 현장 수용성, 낮은 안전의식과 안전문화 등으로 진단하면서 이를 중대재해의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단을 바탕으로 향후 ‘로드맵’의 방향으로 책임성, 현장성, 혁신성을 기본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기본 원칙은 ‘로드맵’을 통해 중대재해 감소를 위한 한국사회의 변화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방향 또한 바람직하다고 평가한다. 책임성에서는 이번 로드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규율’(self regulation)과 예방 역량 향상을, 현장성에서 현장의 전달, 혁신성에서 기존 관점을 넘어서는 혁신적인 방안 모색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1) 위험성평가 중심의 자기 규율적인 예방체계 확립, 2) 중소기업 중대재해 취약분야에 대한 집중지원 및 관리, 3) 참여와 협력을 통한 안전의식 및 문화 확산, 4) 산업안전 거버넌스 재정비 등 4가지 추진 과제를 제시하고 각 항목별로 세부과제들을 세밀하게 제안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26년까지 한국의 사고사망 만인율을 0.29‱로 감축하여 산업안전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Ⅲ. ‘로드맵’의 한계1 : 자기 규율의 실종
사실 정부의 ‘로드맵’의 기본 원칙과 과제의 방향은 산업안전 선진국의 사례 및 국내 현실을 반영하여 제대로 설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세부적인 항목들을 살펴보면 기본 원칙과 방향이 점차 희미해져 가면서 기존 ‘지시적 규제’의 나열에서 탈피한 새로움이나 기존의 관점을 넘어서는 혁신성은 사라지고 안 보인다. 이는 로드맵에서 기본 원칙으로 제시한 책임성, 현장성, 혁신성 간 상호작용과 시너지 효과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기존 중대재해 감축 노력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점에 서 있는데,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 없이 기존 예방 대책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드맵 및 후속대책의 문제점으로 원칙과 실천과제가 (유기적 결합이 아니라)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존 산재예방 대책이 앞서 지표로 확인한 바와 같이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또한 전문가 주도의 산재예방 대책에 내재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산재예방 대책을 모색할 때 한국에서 전문가들이 많이 검토한 1972년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8)처럼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이에 상응하는 대책들을 검토할 시점이다. 그런데 ‘로드맵’의 경우 원인 진단과 방향제시는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대책에서는 여전히 기술적인(technical) 기존 예방대책을 반복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거시적인 경제 및 사회 ‘구조’의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현장 이해당사자들은 기술적 예방대책의 단순 실행자로 전제한 채 다양한 세부대책을 모색하다 보니, 지시적인 세부 대책들이 여전히 반복해서 나열되고 있다.
1. 위험성 평가 세부 지침에서 사라진 자기 규율
2022년 11월 제시한 ‘로드맵’의 기본 원칙 중에서 핵심 중 하나는 ‘자기 규율 예방체계 확립’을 위한 위험성평가 제도의 활성화이다. 이러한 원칙과 방향에는 동의한다. ‘자기 규율’은 ‘self-regulation’에 대한 번역인데, 여기서 ‘자기’는 주체(self)로서의 노사가 산업안전보건 관리체계 수립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로벤스 보고서’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로드맵’에서는 간과하고 있다. 로벤스 보고서에서는 1970년대 초 영국 산업안전보건체계의 문제점으로 너무 많은 수의 법령이 존재하지만 그 내용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복잡하며, 행정의 집행 역시 파편화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로 인해 특정 부분은 중복 감독되는 한편 어떤 부분은 감독의 공백이 발생하고 있으며, 다양한 행정기구 간에 소통 부재가 있으나 이를 통합할 부처가 존재하지 않아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의 규범적 상황과 안전보건에 관한 노동 현장의 상황을 절충하여 제시하는 것이 바로 로벤스 보고서의 핵심적인 철학인 자기 규율(self-regulation)이다(류현철, 2022).
그런데 ‘로드맵’에서는 행정의 집행 단계에서 파편화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로드맵’에서 자기 규율에 기반한 위험성 평가를 강조하고 있으면서, 정부와 안전보건공단은 또다시 130여 페이지에 달하는 위험성평가 매뉴얼을 제작해서 배포하면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일일이 지침으로 정하고 평가표까지 제공하고 있다(안전보건공단, 2023). 전담 안전관리자를 거의 선임하지 않는 중소기업들이 이 매뉴얼을 따라하기 어렵다는 불만들이 나오자 80여 페이지의 <중소규모 사업장을 위한 쉽고 간편한 위험성평가 방법 안내서>를 별도로 제작해서 배포하고 있다(고용노동부·안전보건공단. 2023). 그리고 매뉴얼에서 노동자 ‘참여’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노동자(노동조합)에게 위험성평가 전반적인 운영과정에 대해서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위험성평가를 진행할 때 참여를 강조하여 노동자를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즉, 자기 규율을 위해 노동자도 자기(self), 즉 주체로 존재해야 하는데 매뉴얼에 따라서 위험성평가 할 때만 의견을 개진하는 소극적 참여자에 머무르고 있다. 더욱이 노동자들의 대표인 노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체계’의 문제점: 명령지시적 규율의 부활
2022년 1월 27일부터 5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는 중대재해처벌법에서도 중대재해 감소를 위한 법의 취지와 달리 시행령에서 자기 규율에 기반한 산재 예방은 일부 내용에 불과하고, 서류작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4조에서는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이행조치’를 9가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주체로서 노사의 역할은 부수적이다. 사업장 ‘산업안전보건체계’를 사업장 노사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보건담당 부서(및 최고책임자)에서 1) 안전보건목표, 경영방침 설정 2) 안전보건총괄전담조직 3) 유해위험요인 확인, 개선 업무절차 4) 안전보건 예산편성 5) 안전보건관리책임자 등에 대한 평가 6) 안전보건전문인력배치 7) 종사자의견 청취절차 8) 비상대응 매뉴얼 9) 도급용역위탁시 조치 등을 시행하고 이를 서류로 구비해 두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7번에서 잠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중처법’에 기반한 복잡한 시행령을 준수하려다 보니 대기업들은 외부 로펌에 의뢰해 안전보건체계를 구축하고,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준비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중대재해처벌법의 유예를 요구하고 있다. 로벤스 보고서에서 (‘자기규율’의 반대로 지적한) ‘명령지시적 규율’의 한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또다시 로벤스 경이 질타한 복잡성만 높아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9가지 시행령 내용에 대해 사업장 내 구성원들의 준수(compliance)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Ⅳ. 로드맵의 한계2 : 원칙과 대책의 분리-혁신적 원칙과 두더지잡기 대책
한국의 안전보건 수준 향상은 안전 및 보건 전문가들이 앞서 문제제기하고, 이를 현장 노사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정부에서는 관리감독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노사정+전문가가 함께 노력한 성과이다. 그렇지만 사회구조가 복잡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기존 안전 및 보건 전문가 이외에 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사업장 안전보건 및 중대재해 예방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이러한 내용들이 중대재해 감축 노력에 반영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원하청관계의 심화와 고용형태의 다양화, 사내(하)도급, 용역, 파견 등 중층적인 고용이 확산되면서 산업안전보건 취약부문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해율은 감소했으나 안전보건수준이 향상되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 예를 들면 기업규모별 사고사망자수에서 중소영세 사업장 소속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재해 문제는 지금까지 산업공학(안전), 의학·간호학(보건)영역에서 주로 논의되고 왔으며, 재해 예방을 위한 노력들이 지금도 지속하고 있고, 또한 상당한 성과를 도출하였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위험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은 내재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기존 안전보건 전문가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계속 나타나는 산업안전 취약부문에 대해서는 외재적인 접근, 사회구조적인 접근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 물론 최근에는 산업안전보건 영역에서 중소기업 및 원하청 문제, 플랫폼 고용 등과 산업안전보건과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논의들은 진단으로만 그치고 대책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를 몇 가지 예를 통해서 살펴보자.
1.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이 공정별 안전수칙을 잘 지키지 않는 원인?
1995년 한진중공업에서 작업하던 수리선박에서 폭발사고로 인해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다. 안전보건공단에서는 당시 조선소들이 위치한 부산·경남·울산을 관할하던 광역 부산지역본부에 ‘조선업재해예방팀’을 별도로 만들었다. 조선업은 제조업 중에서 건설업 못지않게 중대재해 문제가 예전부터 심각했기에, 조선소들이 밀집한 부산지역본부에 별도의 조선업 전담팀을 두고서 조선소 재해감소를 추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2000년대 초반 조선업 생산현장에서 사내하청 고용이 직영 고용을 앞지르기 시작하던 때였고, 그 결과 사망사고의 피해자 중에서 점차로 사내하청 노동자의 비중이 높아져가고 있었다(박종식, 2014). 이와 같은 조선업계의 고용구조 변화 현실을 인식하고서 사고예방 노력의 일환으로 2006년도에 안전보건공단 조선업재해예방팀에서는 ‘조선업 협력업체 근로자를 위한 20가지 안전수칙’을 주요 공종(용접, 도장, 족장 등)별로 제작해서 홈페이지에 등록하고 현장에 배포하였다. ‘로드맵’에서 청소경비 등의 용역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으로는 직종별 안전보건교육 및 산재예방 및 스트레스 관리 정보 제공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청업체·용역업체 소속으로 인해 발생하는(예를 들면 원하청 간 현장 소통 분리로 인한 리스크 대응 어려움) 안전보건 리스크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가 없다.
조선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산재가 집중되는 것이 기존에 있던 용접이나 도장 작업 시 안전수칙을 몰라서였을까? 당시 안전보건공단에서는 조선업 하청 노동자들이 대부분 중대재해 피해자라는 특성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방 대책에서는 기존 조선업 산재예방 대책과 같이 탑재작업자 추락 주의, 용접작업자 폭발 주의 등 산재유형에 따른 사고예방 대책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즉 사업장 내에서 원청이 아니라 (하)도급 사업주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발생하는 산재는 고용형태나 원하청 관계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방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부재했거나 설령 대책을 제안했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2. 임금노동과 플랫폼노동의 차이는 안전보건에 반영되고 있는가?
이러한 사례는 비단 조선업 사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플랫폼 노동의 확산과 산업안전보건 대책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음식배달 라이더 플랫폼 노동을 보자. 예전 음식배달원들은 중국집이나 피자가게, 치킨가게 소속으로 월급받고 일을 하다가 최근 배달앱이나 지역 플랫폼을 통해서 일감을 구해서 일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과 동일한 업무를 하지만 계약관계가 변한 것이다. 그런데 ‘로드맵’에서는 최초 입직 시 건설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기초안전보건교육 도입, 2~3년마다 보수교육 의무화, ‘1인 작업자’(lone-worker)에 대한 안전보건 가이드라인 마련·배포 등의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책들을 ‘새로운 위험요인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기존 음식점 소속 배달원일 때와는 달리 플랫폼 업체들의 배달앱 알고리즘이 배달기사들의 안전에 위협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이에 따라서 알고리즘에 대한 안전보건 규율이 필요하다는 대책으로 아직까지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로드맵’에서는 새로운 위험요인으로 산업구조 및 기후 변화 등에 대해서 대비하겠다고 하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일반적 산재예방 대책’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 자체의 고유한 ‘특수성에 기반한 산재예방 대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3. 중소사업장 특성에 따른 대책의 체계화 필요
‘로드맵’에서도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서 중소기업을 취약 분야로 선정해서 집중적인 관리를 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수십만 개에 달하는 50인 미만 중소사업장에 대해 사실상 동일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즉, 중소사업장의 특성을 고려한 거시적인 접근이 부재한 점이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중소업체들마다 업종 및 주요 직종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중소업체들의 특성을 고려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건설업과 제조업에서 산재예방을 위한 스마트 기술 및 장비를 지원하는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중소업체들이 하청업체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원하청 안전 상생협력 강화도 제시하고 있다.
중소기업이지만 중소기업의 성격과 유형에 따라서 산업안전 대응역량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소기업들의 특성을 고려한 대책들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대기업 사내하청업체들의 경우에는 중소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안전보건관리 수준이 높다. 원청의 지원을 받아서 KOSHA-MS9)를 인증받은 업체도 있고, 최근 조선소에서는 원청의 안전관리자 인건비 지원을 통해 하청업체에서 별도의 안전보건관리자를 채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원청-사내하청 업체 간 원하청 공동 산재예방회의 및 합동현장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내하청 중소기업들이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을 수는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원하청 관계에 포함된 중소업체들의 경우 원청에서 ESG10)차원에서 하청업체의 산업안전보건체계 구축에 일정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로드맵’에서도 이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바람직하다.
그런데 중소기업 중에서 원하청관계와 무관한 ‘독립’ 중소기업도 다수이다(박종식 외, 2022). 이들은 안전보건 인력 및 예산 모두 부족한 상태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 차원의 중소기업 안전보건 대책에서 독립 중소기업을 취약분야로 인식하고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중소기업의 수가 너무 많아 정부가 일일이 커버하기 힘들다. 이러한 점에서 ‘독립’ 중소기업의 산업안전 대책은 지역 차원이나 업종 차원에서 예방사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로드맵’에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할 지역 안전보건 활성화는 ‘산업안전 거버넌스 재정비’라는 다른 추진 과제 항목에서 논의되고 있다.
4. 두더지잡기식 대책이 아닌 혁신적인 대책 모색 필요
필자는 ‘기업간 관계’나 ‘고용관계’에 대한 접근만으로는 중대재해가 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의 기본은 산업공학적, 산업보건학적 위험요인의 제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다만 기본적인 또는 일반적인(general) 산재예방 대책으로는 변화하는 사회에서 산업안전 취약부문을 아우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과학적 변수를 통한 접근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과 출신의 전문가들은 사회변화에 따라서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을 목격하고는 있는데, 특수성을 고려한 혁신적인 예방대책에 대해서는 그동안 고민이 부재했던 것 같다. 즉, 3차 방정식을 2차 방정식 근의 공식으로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로드맵’에서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서는 혁신적 방안을 모색하겠다고(혁신성) 하지만 세부적인 항목에서는 늘 기존의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들에게 익숙한 안전교육, 보호구 장비 지급, 가이드라인 배포 등에 머무르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서 기존 전문가들이 익숙한 일반적인 접근의 한계를 ‘두더지잡기’ 대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땅속 두더지사회에 구조적 모순들이 응축되었다가 모순의 에너지가 폭발하면 두더지(문제점)가 한 마리씩 기어나올 때 땅 밖으로 나오는 두더지만 때려잡는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드러나는 산재위험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데, 근본 원인의 해결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중대재해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2023년 12월 초 한국은행에서는 기존 저출생 대책과는 차원이 다른 획기적인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출산율을 지금보다 0.845명 높일 수 있는 대책을 제시했는데, 도시인구 집중도 완화(+0.414명), 혼외출산 비중 상승(+0.159명), 청년층 고용률 향상(+0.119명), 육아휴식 실제이용기간 증가(+0.096명), 가족 관련 정부지출 증가(+0.055명), 주택가격지수 하락(+0.002명) 등이다. 기존 저출생 대책인 출산장려금 지급이나 보육비 지원 등의 대책과는 차원이 다른 혁신적인 대책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20여 년 동안 수백 조원을 쏟아붓고도 출생률이 계속 낮아지는 원인은 늘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비슷비슷한 대책들만 제시하고 예산을 썼기 때문이라는 진단으로 혁신적인 대책을 한국은행에서는 검토하고 있다. 중대재해 감소 노력도 마찬가지이다. 매번 안전교육 강조, 보호구 장비 지급, 직업별 안전 가이드라인·매뉴얼 제작만으로는 중대재해의 획기적인 감소를 기대하기 어렵다. 보다 근본 원인(root cause), 구조적 원인에 대한 진단과 분석이 실제 이행 전략으로 이어지는 ‘혁신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Ⅴ. 결론을 대신하여: 노사참여 활성화와 안전보건의 배타적 영역 확보
그동안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은 많이 향상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중대재해 발생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여전히 높은 편이며, 앞으로 기존 산재예방 대책과 혁신적인 산재예방 대책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산의 지점’(point of production)인 작업장에서 산업안전보건 관리체계의 4주체 중에서 사업주와 노동자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이다. 아무리 좋은 관련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어도 ‘노동자의 배제와 사업주 무관심’인 상태에서는 사업장의 안전문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참여는 일터혁신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통한 산업안전 수준 향상 방안을 고민할 수도 있다. 즉, 노동자 참여를 당위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법이 정한 안전보건교육을 실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업이 정한 위험성과 대처방안에 대한 인지 여부, 안전보건과 관련한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 등에 대한 정보제공 등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가지고 전달되고 체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조성재 외, 2021).
둘째, 기존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체계나 제도에 이제는 노사참여를 전제로 노사관계라는 옷을 입혀 보다 생동감있는 산업안전보건 체계를 활성화시킬 방안을 모색할 시점이다. 1990년대 이후 치명적 재해율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켜 온 독일은 ‘조합주의에 기초하여 사업주 및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지역·업종별 노사자치입법을 통해 자율 예방규칙을 제정·준수하는 안전문화를 확산’하고 있다(관계부처 합동, 2022: 31 참고). 이러한 점에서 한국에서도 노사참여, 특히 지역 업종별 차원에서의 노사관계를 통해 사업장 안전문화를 구축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사업장 내에서 산업안전보건의 배타적인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한국의 사업장에서는 안전보다 생산을 우선하는 문화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경영활동이나 노동조합의 사업에서 산업안전 관련 내용들이 부차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노사 간 단체교섭에서도 안전 관련 내용들이 부차화되거나 협상카드가 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또한 노조의 전임활동 시간 보장(타임오프)이 노조활동 전반에 활용하도록 규정하고 있기에 단체교섭이나 조합원과의 활동이 우선이고 사업장 안전보건 활동이 부차화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업장 내 회사의 활동, 노조의 활동, 노사의 활동에서 안전보건 관련 내용들을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것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방세 납부할 때 교육세를 일정하게 부과하여 교육재정을 확보하고, 이는 교육에만 사용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문제의식이다. 건설업의 사례와 같이 회사와 노조의 지출에서 일정한 비율을 반드시 안전보건 활동에 사용하게 하는 방안을 전업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회사의 안전관리자는 규모에 따라서 안전관리자수 및 보건관리자수를 정하고 있는데, 노조의 안전보건활동 활성화를 위해서 회사 규모에 따라서 노조의 안전담당자 수도 정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산재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현장의 위험을 가장 잘 아는 노동조합(노동자)의 참여와 감시를 통해 사업장에서 일상적인 산재 예방 관리체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참여와 배타적인 안전보건 활동을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의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명예산업안전감독관과 같은 노동자 참여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회의시간은 유급으로 보장되고 있으나 이를 위해 필요한 현장점검 시간은 보장되지 않고 있다. 회의시간 뿐 아니라 현장점검 시간도 유급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사실상 사업주의 동의나 허가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는데, 현장 예방활동을 위한 별도 시간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현재 노조들에서는 근로시간 면제 시간(타임오프) 중 일부를 현장 점검 및 예방활동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노사협의·교섭, 고충처리, 산업안전 활동, 건전한 노사관계 발전을 위한 노동조합의 유지 및 관리업무라는 노조활동 중 일부만 유급으로 인정하는 근로시간 면제제도가 시행되면서 노조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고, 이는 노조나 노동자의 안전보건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존 노사 및 노사관계에서 안전에 대한 역량을 일정 규모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사관계에서 산업안전 영역에 대한 일종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사관계는 상대적인 교환으로 일종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11)의 성격이 있지만, 산업안전은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 그리고 사업장의 안전과 원활한 운영이라는 점에서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12)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상대적인 교환의 영역에서 점차 절대적인 기준의 영역(산업안전)을 꾸준히 확장해 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조합이든 회사든 안전보건에 대한 투자와 역량 확보 없이는 이후 제대로 된 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사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절대적인 기준을 확대해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업장 차원에서 안전보건교육과 위험성평가의 연계 운영을 제안하고자 한다. 사업장에서는 현장 노동자들이 현장의 위험요인을 안전관리자보다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위험성 평가는 안전관리자 중심의 서류작업이 되면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통한 위험요인 발굴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는 사업장의 위험요인을 발굴하기 위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존 안전보건교육을 해당 업종·직종의 위험요인에 대한 교육 중심으로 노사가 재편할 필요가 있다. 전적으로 현장의 위험요인 발굴 및 대응 방안을 알려주는 안전교육이어야 한다. 그래서 매월 진행하는 안전교육과 매년 진행하는 위험성 평가는 서로 시너지효과 날 수 있도록 노사가 함께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노사 모두 여력이 된다면) 매년 해야 하는 위험성 평가는 사업장 단위로 1년에 한 번 하는 대규모 노사공동 안전문화 축제이자 의식(ritual)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 창립기념일이나 노조기념일 전에 대규모 위험성 평가를 진행하고, 기념일에 안전문화 행사를 노사가 공동주관으로 크게 하는 것 등의 방안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결국 (안전)문화는 노사 양 주체들이 모두 참여할 때 바뀌는 것이지 한쪽 주체가 수동적으로 끌려가서는 형성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