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에서 본 낸 골딘은 자신의 대항 미학을 사회적 활동 속에서 다시금 실천하고 있었다. 2014년 손목 수술 후 옥시콘틴이라는 진통제를 복용한 낸은 약물중독 증세를 보이며 결국 각종 마약을 찾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년 2개월간의 재활원 생활 후 그녀는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한 약물이 강한 마약성 중독을 가져오며 그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고 있는 현실을 알리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한 그룹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이하 PAIN)을 설립한다. 옥시콘틴의 제약사는 새클러가(Sacklers)가 세운 민간회사 퍼듀 파마(Purdue Pharma)라는 곳으로, 이들은 말하자면 사람들의 고통을 상품으로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취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PAIN이 제기하는 첫째 문제라면 둘째 문제는 그러한 이윤의 상당 부분이 예술 문화 지원에 쓰이면서 새클러가의 자본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자산이라는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낸은 전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향력을 가진 예술가다. 낸은 미술관에서 새클러가의 후원을 받지 않도록 촉구하는 활동을 하고 이에 응답하지 않는 미술관에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권위를 미술관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썼다. 공적 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은 범죄와 부패를 은폐하는 방법으로 존속하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낸 골딘의 전시회를 열고 문화예술을 보전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 새클러가의 후원을 철회하기로 발표하자 곧이어 테이트와 구겐하임 미술관 등 다른 유수의 미술관들도 줄줄이 후원을 철회했다. PAIN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새클러의 공헌을 기리는 이름을 기입한 미술관들에 새클러라는 이름을 지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PAIN은 약물중독과 연결된 또 다른 문제들, 약물 중독 환경 개선이나 약물 중독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 등을 바꾸기 위한 활동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PAIN의 수많은 사람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것처럼, 낸은 그 이전에 사진 속 많은 친구를 잃었다. 친구들의 상당수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으로 사망했고 낸 골딘은 그들이 죽음에 이르는 몇 년간을 기록했다. 그들은 공포감과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좌절감에 맞서며 죽음의 시간과 맞닥뜨려야 했다. 1980년대 발견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과 낙인을 낳았다. 성적 취향을 질병과 연결하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질병의 본질은 은폐되고 왜곡됐다. 친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낸의 사진은 사회적 불의에 맞서 “우리의 사라짐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2010년대 그녀의 PAIN 활동 역시 몸의 고통과 그것의 은폐를 통해 작동하는 사회를 문제로 삼는다. 약물중독에 시달리는 이들은 나태하고 의지박약한 인물로 낙인찍혀 이중으로 고통스럽다. 중독은 마치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몇몇 사회 부적응자의 문제인 것처럼 괄호 쳐 있다. PAIN의 활동은 은폐된 질병으로부터 고통스런 몸을 해방하기 위한 활동이고 그 은폐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낸 골딘의 미학은 몇십 년에 걸쳐 거리낌 없는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낸 골딘은 한 대담에서 인스타그램에 대해 비판적으로 진단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사진 이미지와 그 속의 대상을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우리에게는 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작업은 말하자면 저녁 식사를 소개하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며 우리가 그보다 더 중요한 진짜 경험을 사진을 통해 이야기하면 좋겠다고, 자신의 누드 사진이 계속 삭제되는 것에 맞서 계속 사진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은 외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다. 낸 골딘의 사진은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쉽게 놔주지 않는다. 그것은 SNS에 붙들려 왕왕 무의미하게 연장되는 시간 대신 깊고 고요하게 대상에 들어가는 시간을 선사한다. “사진 속에 담긴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하길 바랬다”는 낸 골딘의 말처럼 낸의 사진은 거리낌 없는 몸과 정신으로 서릿발 같은 시선을 던지며 여전히 우리를 응시한다.
그렇게 낸 골딘은 고통을 은폐한 세상의 미(아름다움) 대신 고통에 당당히 맞서 대결하는 미(아름다움)의 위엄있는 삶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식별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 우리보다 더 진짜인 우리의 모습은 언제 어디에서 포착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진짜 경험하고 거리로 나가라고 조언한 낸의 말을 다시 빌리면, 진짜 경험과 거리에서 우리는 어떤 거리낌 없는 세계를 갈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