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숙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22년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작년에는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발발하여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공방이 벌어지는 전쟁 이외에도 현대사에는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 정치 경제학적 이해관계 등을 이유로 한 크고 작은 군사 분쟁이 계속 있었고 지금도 어디선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를 다룬 많은 전쟁영화가 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더 봐야 우리 시대의 전쟁을 다 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수많은 전쟁영화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참상이 저절로 우리를 전쟁에 대한 이해와 극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영화의 무참한 스펙터클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구경거리를 보는 위치에 선다. 다시 말해 그 위치에서 목격하게 되는 끔찍하고 비참한 상황은 그것을 보는 사람과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광경이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보는 전쟁이다.
그런데 <알포인트>(공수창, 2004)는 구경만 하면 되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기는커녕 대한민국이 베트남 전쟁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신랄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전쟁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영화적 성취는 피아의 비극적인 대립 대신 전쟁의 행위자와 그에 희생되는 존재의 성격을 엄정하게 다룸으로써 이뤄진다.
담당 군부대가 실종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해당 지역인 ‘알 포인트’로 배치된 수색대는 초반부에 마주친 여성 게릴라군을 제외하고는 적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과 마주치지 않는다. 수색대는 적군이 존재하지 않는 전쟁터에서 원혼의‘베트남 여성’을 반복적으로 대면하게 된다.
이 원혼은 하나의 억울한 죽음을 넘어선 역사적 존재다.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 미국 등으로 이어지는 외세의 속박과 간섭에 오랜 기간 시달려왔고 여기서 혼령은 국제관계로 인해 발생한 민족주의 독립투쟁의 주체로서 식민주의의 역사를 환기한다.
또 그 혼령은 승전으로 획득되는 국가권력의 외부에 위치한 소수자로서 가부장제의 지배 구조 또한 소환한다. 베트남 여성으로 나타나는 원혼은 지배적인 역사의 모순이 야기한 폭력에 희생된 아래로부터의 형상으로서 알 포인트 수색대에 출몰한다.
이제 이 영화가 원혼의 복수극이라고 말해버릴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영화는 초월적 존재가 공격하는 데서 오는 공포보다 그 공격의 방법이 더 공포스럽다. 인물들의 죽음은 그들 자신의 죄책감이나 두려움, 그리고 서로를 향한 행위로 일어난다.
일례로 수색대 일원 중 오규태 병장은 베트남에서 만난 전우가 자기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려던 카메라를 맡아두었는데 그 전우는 전사했고 오 병장은 카메라를 그의 여자친구에게 보내주려는 노력 대신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린다. 그런데 알 포인트에서 오병 장이 그 일에 대한 죄책감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오 병장은 죽은 전우의 환영에서 도망치다 수색대가 설치한 부비트랩을 밟고 사망한다.
이처럼 수색대의 죽음에는 어떤 외부의 적도 관여되지 않으며 서로의 불화만이 자신과 서로를 향해 작용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혼령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전쟁은 아군과 적군의 싸움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원혼은 눈을 통해 수색대원에게 빙의하는데, 그렇게 그들에게는 갑작스럽게 전쟁의 진실이 도달한다. 그 진실은 직접적으로는 각자의 무의식에 담겨있던 사연을 빌리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제국주의 역사의 피해국이면서 동시에 베트남을 상대로는 제국의 식민주의적 논리에 따라 무력을 실행한 가해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원혼을 통해 총구를 다시 우리 자신에게 겨눔으로써 침략을 당했던 국가이자, 침략한 모순을 품고 있는 한국사를 문제로 삼는다. 베트남 전쟁에 우리를 공격하는 외부는 존재하지 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위협적일 뿐이다.
<알포인트>에서 보여주는 전쟁은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는 전쟁을 구경하게 하는 대신 우리가 꼭꼭 숨겨두고 외면하던 우리의 침략적인 전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스스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 수색대원들은 이 영화에서 과오를 질책받는 우리 국가의 폭압적인 역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배제된 이들이다. 그들은 가난을 이겨내고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적은 임금에도 목숨을 걸고 용병으로 복무하면서 비행기를 타보고 싶은 욕망, 부모에게 소를 선물하고자 하는 의지, 어린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뿐이다. 전쟁에 얽혀 피로 얼룩진 이들은 전쟁에 걸려있는 이해관계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이처럼 전쟁이 초래하는 가혹한 죽음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텅 빈 건물과 마주하게 된다. 왜 밤사이 일어난 수색대의 죽음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왜 그 공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단 한 명의 수색대원 장영수 병장만이 울고 있을까?
해가 뜨고 우리의 시야에 도달한 텅 빈 건물의 이미지에는 전쟁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에게 존재하는 베트남 전쟁일 것이다. 그것은 잊혀진 전쟁이다.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고 외면한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지도 용기를 내고 있지도 않기에 가시화되지 못한 베트남 전쟁은, 전쟁이 지워진 공간의 이미지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이미지로 작용한다.
나아가 그 텅 빈 이미지는 전쟁의 중심에는 공허만이 있음을 전한다. 다시 말해 전쟁이란 계속해서 서로를 향해 겨누는 총구 말고는 마주할 것이 없으며, 그 싸움의 지속을 멈추고 끝에 섰을 때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말이다.
살아남은 수색대원은 형이 받은 입대 통지서를 훔쳐 대신 베트남에 온 이로, 수류탄이 떨어지자 그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자신의 몸을 날리다가 눈에 부상을 당한다. 그는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살아남는 전쟁의 역사를 실행하거나 그 진실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가 예외의 인물이 됨으로써 이 영화는 전쟁에서 반전의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나 원혼의 복수극과는 다시 한번 선을 긋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한, 즉 전쟁을 실행하지 못한 이에게 더는 죽음의 꼬리를 물고 다시 총구를 겨눌 상대가 없다. 그렇다면 전쟁의 역사는 지속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알포인트>는 텅 빈 건물에서 멈추었지만, 이제 다시 어떤 욕망을 실행하여 이야기를 이어가고 이미지를 연결할 수 있을지는 우리 자신이 이어갈 역사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우리에게는 흔적 없는 이미지를 견디며 우리의 전쟁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하나의 길이 있고, 아니면 텅 빈 공간이 전하는 진실을 외면하고 의미 없는 수색 속에 참상의 밤을 보내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