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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하지 말고, 그려서 보여줘라

등록일 2018년12월05일 14시0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오필민 컬럼리스트

 


 

글은 그림이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 재미가 떨어진다. 그려야 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와 공간을 한 장면 한 장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 모양은 어땠는지,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친구들과는 어디에서 만났는지……. 독자를 그 시대로 데리고 가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는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한 개발독재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칠십 년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뜬구름처럼 여겨진다. 옷을 만들던 노동자의 나이는 몇 살이었는지, 그들이 일한 일터는 어땠는지, 하루 몇 시간 일했는지, 한 달에 며칠을 쉬었는지, 끼니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잠은 어디서 잤는지…….


조영래 선생이 쓴 『전태일평전』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는 까닭은 그 책에 한 ‘여공’의 삶을 그린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그 여성 노동자의 삶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오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청소년이나 청년이 읽으며 그 시대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전태일평전』 앞부분에 ‘다락방 속의 하루’라는 꼭지가 있다. 여기에 ‘열세 살의 한 여공’이 등장한다. 여기엔 ‘비좁은 작업장에서 일했다’로 열악한 환경을 표현하지 않았다. 독자에게 그 시대의 작업장을 보여줬다. 동영상으로 기록하듯.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재단판과 열네댓 대 되는 재봉대(미싱다이)와 거기에 맞붙은 시다 판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방 안에 꽉 들어차고 그 틈서리 틈서리에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의 종업원 32명이 끼어 앉아 일한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1.5미터 정도. 이것이 저 악명 높은 평화시장의 다락방이다. 원래는 높이 3미터 정도의 방이었던 것을 공중에다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여 그것을 두 방으로 만든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왜 그녀에게는 이렇듯 좁은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여공들은 허리를 펴고 걸어 다닐 수가 없다. 청계천 6가 쪽 고가도로를 차를 차고 달리면서 이 작업장들을 보면 마치 무슨 돼지우리나 닭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틈서리에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 ‘허리를 펴고 걸어다닐 수 없다’ 이런 표현이 중요하다. 6쪽에 걸쳐 보여 준 ‘다락방 속의 하루’를 통해 독자는 전태일이 되거나 전태일의 삶에 빠지고 만다. 이 꼭지가 있었기에 전태일과 여공이 이어지고, 이후 전태일의 삶이 오늘까지 남을 수 있다.


소설가 김훈은 드론에 카메라를 달고 촬영하듯 멀리 혹은 가깝게 작가의 시각을 바꿔가며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작가는 생각이나 판단을 글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렌즈에 들어온 풍경을 독자의 시선으로 이동시켜 드러나게 한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한다.


‘할 말이 많은데 막상 글로 쓰려면 안 된다.’ 이런 어려움은 생각을 활자로 옮기는 일에 급급하기 때문에 생긴다. 내 렌즈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려준다고 생각하고 그걸 옮겨주면 되는데 그 연습이 부족해서 글쓰기가 어려워진다. 내 눈에 들어온 걸 분석하고 평가해 판단한 걸 쓰려고 하지 말고, 내 눈으로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독자가 볼 수 있게 하면 된다. 내 시선을 독자에게 활자로 보여주지 말고, 내 시선의 지점으로 독자의 시선을 옮겨 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하고픈 말은 이거야!’ 논리를 따지며 글로 쓰지 않아도 독자가 작가의 시선으로 사물과 사건을 판단한다.


“아빠는 네 나이 때 ~~했는데, 너는 ~~해서 되겠냐.” 아마 자신이 커올 때 듣기 싫었던 말일 것이다. 그 말을 자식에게 하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30년 전 민주노조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요즘 ‘요즘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우리 때와 달리 ~~’라고 말할 때 무척 불편하다. 그 시절을 공감하도록 그려서 보여주지 않고, 요즘 노동운동을 비판할 때 말이다. 세대 간의 벽은 주장할 때 생기고, 그려서 보여 줄 때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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