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민 칼럼리스트
글을 쓰자! 마음을 다지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고 글이 나오는 건 아니다. 자판을 두들기거나 원고지에 글씨를 적는 행위는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에 가깝다. 원고지를 펼치기 전까지의 행동이 충분하게 익지 않으면 글쓰기는 고역이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모니터에 껌벅이는 커서와 눈싸움을 하고, 신경질을 부리듯 백스페이스키를 두들길 뿐 검은 글자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좌절한다.
관심 갖기. 세상의 온갖 ‘쓸 데 없는’ 사물이나 사람, 사건에 대해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언제, 어떤 주제에 대해 글 쓸 일이 생기더라도 술술 글이 나온다. 글이란 세상에 없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듯 지어내는 행위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무엇인가를 종이라는 세계에 옮겨 적는 일이 글쓰기다. 세상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글쓰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집중하기. 관심만 가져서는 백지 세상에 옮겨 적는 일이 힘들 수 있다. 온갖 쓸 데 없는 것에 관심을 갖다가 무엇인가에 마음이 닿는 순간 집중해야 한다. 이때는 주변을 지우고 마음이 간 그곳에만 집중해야 한다. 길섶에 핀 작은 꽃에 마음이 꽂혔다면 그때부터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빛깔은 어떤지, 생김새는 어떤지, 바람이 불 때 어떤지, 햇빛을 받을 때 어떤지, 비가 올 때 어떤지, 밤에는 어떤지……,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흠뻑 주어야 한다. 그 꽃이 자신이 되고, 자신이 그 꽃이 될 때까지. 여기서 꽃은 때론 사람일 수 있고, 어떤 사건일 수도 있다.
먹고 살기 바쁜 데 주변의 온갖 쓸 데 없는 것까지 관심을 갖고, 밤낮없이 집중하라니 말이 되느냐고 따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과 자신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집중하기를 바란다. ‘나’라는 존재도 우주이고, 자신의 노동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니.
글은 넓디넓은 세상을 한정된 종이에 옮기는 일이니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세상을 글씨로 한 방에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아직까지는 발명되지 않았으니, 피사체를 일일이 글자로 새기려면 관심을 갖고 집중해서 자신의 몸이라는 저장장치에 새긴 뒤 인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관심 갖기와 집중하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글을 만들 수 있는지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이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시인은 요즘과 같이 녹음이 짙은 날, 길가나 숲속의 나무를 바라보다 벌레 먹은 나뭇잎에 관심 갖고 집중하기에 들어갔다. 구멍 난 나뭇잎 사이로 하늘도 봤다. 나뭇잎에서 노동하는 손을 보았다. 평생 노동하다 떠난 시인의 어머니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곱고 예쁜 나뭇잎도 아니고 벌레 먹은 나뭇잎으로 글을 쓰려는 마음은 책상 위에 앉아서는 결코 생길 수 없다. 대부분은 곱고 예쁜 나뭇잎이나 짙푸르거나 연둣빛 나뭇잎을 떠올릴 것이다. 관심을 갖고 집중하지 않으면 벌레 먹은 나뭇잎 사이로 본 하늘이나 노동의 손을 자신에게 주어진 백지의 세상에 담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