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한국노총 정책2본부 부장
11월 13일 정부가 ‘근로시간 관련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설문 조사는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도 무시하면서 극비리에 추진했지만, 그 결과는 너무 뻔했다. 조사 결과, 무려 85.5%가 1주 52시간 노동제 도입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응답했다. ‘1주 52시간 상한제’가 현장에서 무리 없이 연착륙 중이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결과적으로,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통해 확인된 것은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를 위한 정책 추진이 노동현장의 요구와 필요에 전혀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결과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2020년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이미 90% 이상 기업이 1주 52시간 상한제 도입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하는 ‘국민 여가 활동 조사’에서도 국민 3명 중 1명은 ‘일보다 여가’를 중시하는 경향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한국노총이 실시했던 설문 조사 결과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올해 10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정부의 노동시간 정책에 대해 66%가 반대한다고 응답했으며, 지난해 양대 노총이 공동으로 조사한 조합원 대상 실태조사에서도 88%가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서는 1주 52시간 상한제가 1주 52시간 이상 일하던 노동자의 주당 노동시간을 약 4시간 단축하는 효과가 보였다고 확인된 바 있다. 장시간 노동, 그리고 정부의 노동시간 정책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확인할 수 있는 조사 결과는 수없이 많다.
정부의 노동시간 헛발질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던가? 이렇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조사에 무려 약 4억 6천만 원이라는 예산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용자단체 눈치 보기에 급급해 전대미문의 헛발질을 하느라 애먼 국민 혈세가 낭비된 셈이다. 이제 정부는 정책실패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선행하고 추진코자 했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은 당연히 폐기 해야 마땅하다.
▲3월 16일 오전 10시 국회 앞에서 열린 ‘주 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 폐기 촉구 기자회견’
계륵(鷄肋) 신세가 된 정부의 노동시간 정책
하지만 주력사업으로 추진하던 것을 못내 버리기 아까워서일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정부는 설문 조사에서 나타난 국민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한다고 하는 한편, 일부 업종과 직종에 대해 연장 노동 관리 단위를 1주로 한정하지 않고 선택권을 부여하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업종과 직종으로 제조업·건설업, 설치·정비·생산직·기술직을 거론했는데, 이들 업종과 직종은 대표적인 장시간 노동 사업장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모든 사업장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정부 입장은 결국 노동시간 문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으려는 꼼수로 보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꼼수를 노사정 대화를 통해 구체화하겠다고 한다. 정부의 헛발질로 비롯된 뒷수습과 그 책임을 노사정 대화로 전가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사실, 기업 여건에 따라 부득이 특정 기간 연장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경우, 현행법상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제도는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을 6개월까지 확대하여 특정 기간 1주 64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고,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도 신상품·신기술 연구개발업무의 경우 3개월까지 확대함으로써 1주 52시간을 초과하는 근무계획을 세울 수 있다. 재량 근로시간제 대상 업무도 확대하여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와 시간·기간도 확대하여 업무량 폭증 등 일시적 상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현행 근로기준법에서 노동시간 규제조항을 형해화시킬 정도로 거의 모든 빗장을 풀어놓고 있다. 노동시간 규제 회피가 가능한 모든 수단이 펼쳐져 있어 이를 규제할 방안이 더 시급한 마당에, 더욱 노동시간을 유연화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누가 공감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사용자단체만이 노동시간에 대한 모든 법률적 제한과 규제를 몽땅 걷어 내고 싶어 할 뿐이다.
노동시간 사각지대 해소가 급선무
노동시간 정책의 방향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체제를 해체하는 방향, 다시 말해 저임금 노동자가 연장 노동과 휴일 노동을 통하여 생계비 부족을 보충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에 따라 최우선 과제는 근기법상 노동시간 규정이 적용 예외·제외되는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노동시간 특례업종을 들 수 있다. 2018년 근기법 개정을 통해 특례업종을 종전 26개에서 5개(노선여객자동차를 제외한 육상운송업, 수상운송업, 항공운송업, 기타 운송 관련 서비스업, 보건업)로 축소했지만, 이들 5개 특례존치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만 무려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큰 규모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특례업종에 초점을 둔 근로감독을 한 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정부의 노동자 건강권 확보방안으로 유일하다시피 한 ‘11시간 연속휴식’ 조차도 택시사업장의 경우 71.1%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특례업종 이외에도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시간 적용제외 사업장 등 사각지대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시간 정책은 ILO 등 국제노동기준에 따라 노동시간 체제 변화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ILO는 2018년「미래를 위한 준엄한 노동시간 보장」보고서를 통해 노동시간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노동시간은 가족 친화적이어야 한다. 셋째, 노동시간 정책은 성평등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넷째, 노동시간 정책은 생산성을 증대해야 한다. 다섯째, 존엄한 노동시간 체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시간의 길이와 근무 시간표를 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강화함으로써 진전되어야 한다. 이상 다섯 가지 기준이 실현될 수 있도록 정부가 노동시간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로지 기업의 시각에서 노동시간을 바라보는 현재 정부 정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부는 일할 때 바짝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한다지만 불가능하다. 오히려 ILO는 ‘노동시간의 편성’을 강조한다. 즉,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사업주의 지시에 따른 불규칙한 노동시간을 개선하고 균형있게 노동시간을 편성·배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부의 노동시간 헛발질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ILO와 WHO(세계보건기구)가 1주 55시간 이상을 장시간 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마당에, 정작 우리는 1주 69시간이니 아니니 하며 쓸데없는 사회적 논쟁을 치르고 있다. 이제는 대통령이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말하는 바람에 주 60시간이 화두가 될 모양새다. 기계적인 숫자 놀음으로 노동의 미래와 노동자의 안전을 농락하는 슬픈 광경은 이제는 그만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