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헌 前 노동자신문·노동일보 기자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올해 두 노총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노동운동이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이나, 생존권을 지키는 일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앞장서서 하는 것 또한 노동운동 본연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와 공존이냐, 대립과 전쟁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 4월 이후 우리가 가는 길이 평화와 공존의 길인 것은 맞지만 한발만 옆길로 새도 곧바로 위기국면에 들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렵게 만든 판문점회담의 성과를 살려야 하는 것이 누군가는 해야 할, 우리 모두의 일이다. 한국경제의 활로도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족적 과제를 회피하거나 외면한 적이 없다. 지난 100년, 노동자에게 가장 혹독하고 질긴 족쇄는 바로 식민지와 분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새로운 전민항쟁의 시작점이자 한반도 주민들이 자신의 근대적 정체성을 자각했던 시민혁명이었다고 할 3.1운동도 마찬가지였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태화관에 모였던 민족대표 33인이 곧바로 일경에 끌려간 다음 만세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학생들이 ‘동’을 뜨면 수천수만의 군중이 운집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경에 맞서는 것이다. 이런 투쟁이 매일 벌어졌고 서울과 평양에서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노동자들도 나섰다.
3월 8일 조선총독부 직할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여 명이 야간작업을 중단하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다음날인 9일에는 경성전기회사의 전차 운전사와 차장 120명이 파업을 단행했다. 정오에는 동아연초공장의 어린 직공 500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27일에는 직산금광 노동자들이 일제헌병주재소를 습격했고 그해 11월 겸이포제철소 노동자 250여 명이 파업을 벌였다.
이런 투쟁들이 1921년의 부산 부두노동자 5,000명 파업과 22년 조선노동연맹회 결성, 28년 원산 총파업으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3.1운동을 전후한 당시 한반도 인구가 2000만에 못 미쳤고 공장, 부두, 광산 등 노동자는 10만 명도 안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작거나 미미했다고 할 수 없는 기세였다.
민족대표 33인의 구성을 보더라도 3.1운동의 촉발은 종교단체의 역할이 컸다. 구한말 의병을 비롯한 기존 저항세력이 철저히 궤멸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시 천도교와 개신교가 가진 조직력과 자금력이 큰 역할을 했다.
조직과 자금이 중요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은 지금 한국사회의 민주세력 중 그나마 조직과 자금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지난 촛불항쟁 때 여실히 발휘됐다(갖춰야 할 수준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그나마도 다른 단체나 조직들은 비교할 상황 자체가 안 된다.). 노동운동이 자신이 가진 힘을 평화, 환경, 약자보호 등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노동운동의 힘은 더 커질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