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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평범한 사람들이 제주의 4월을 기억하는 방법

김잔디 제주다크투어 사무국장

등록일 2023년03월14일 16시11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평화의 섬, 제주

 

제주도를 부르는 표현 중에는 ‘세계평화의 섬’이 있다. 제주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쟁과 수탈의 피해를 겪었던 곳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누구보다도 평화를 바란다. 제주도는 몽골, 일본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당했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해 제주도 곳곳에 수많은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제주4·3이 벌어졌고, 최근에는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제주도민이 희망하는 세계 평화의 섬 제주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4·3의 역사를 알아보자.

 


△ 해방, 강요배 作(출처: 제주다크투어)

 

통일된 나라를 꿈꾸던 제주도민 그리고 4·3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역사이다.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 냉전의 한 가운데에서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 중 경찰의 발포로 인해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3월 10일, 제주도 전역에서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적절한 사과와 대응 대신 정부는 탄압을 이어갔다.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이후 이어진 가혹한 탄압으로 제주에서는 당시 정부와 미군정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과 미국정은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싶어 했던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일된 한반도를 만들고자 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1948년 5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했다. 단독 선거를 한 달 앞둔 1948년 4월 3일, 이러한 정부의 탄압에 맞서 제주도 전역에서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불행하게도 당시 군정은 제주도민들을 더더욱 가혹하게 탄압했고 그 결과,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3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진행형 제주4·3

 

살아남은 제주4·3 희생자의 가족들은 이후에도 이념적 낙인으로 ‘폭도(새끼)’, ‘빨갱이’ 등으로 불렸다. 반면, 많은 살상을 주도한 군경의 인물들은 정부의 최고위직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1960년 4‧19혁명 때 4‧3 진상조사의 기회가 있었으나, 다음 해 5‧16군사정변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1980년대 제주 대학생조직을 중심으로 집회와 위령제가 거행되면서 다시 4‧3이 수면 위로 오르게 되며,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 제정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연좌제로 고통받는 제주도민이 많았다. 이 때문에 희생자 유족의 상당수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자신의 가족 중에 4‧3 희생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많았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발표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국가 권력을 대표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 공식 사과하는 노무현 대통령(출처: 제주4·3평화재단)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제주공항 서북측과 동북측에서 유해발굴을 추진해 총 38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아직 활주로 아래에는 유해가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에는 제주시 봉개동에 ‘4‧3평화공원’을 조성해 4‧3의 역사와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4월 3일을 국가 지정 추념일로 결정했다. 국가가 나서서 억울한 죽음을 추념한다는 의미다. 2021년에는 「4·3특별법」이 전면 개정되어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군사재판 및 일반재판 수형인의 재심 근거조항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4‧3의 역사를 폄훼하려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검찰은 4‧3 관련 재심과정에서 이미 희생자로 선정된 사람에 대해 보수단체의 허위주장을 근거로 소위 ‘사상검증’이 필요하다며 재심재판을 지연시켰다. 제주보훈청은 4‧3 당시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박진경 연대장의 송덕비를 한라산 전망 좋은 곳에 버젓이 세워두고 있다. 게다가 최근 국민의힘 소속 태영호 국회의원이 4‧3의 역사를 훼손하는 취지의 발언을 지속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빌미로 오랫동안 학살의 주역들은 참회가 아니라 4·3의 정신을 ‘빨갱이사상’으로 매도하면서 자신들은 애국을 한 것이라고 반격하고 있다. 또한 분단과 전쟁을 막으려고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조명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막연히 시대의 희생자로만 언급되거나, 심지어는 국가권력에 도전한 범법자 취급을 받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들

 

현재 생존해 있는 책임자가 거의 없어 재판 등을 통한 실질적인 처벌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신 4‧3 당시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잔인하게 학살하도록 지시한 책임자들의 과오를 분명히 밝혀 우리 역사에 제대로 기록하고 남겨야 하고, 이들의 서훈, 훈장을 박탈하는 등 역사적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인정 희생자에 대한 배제를 중단해야 한다. 현재 「4·3특별법」이 정하는 ‘희생자’란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인(受刑人)을 뜻한다. 그러나 이 모두에 해당하더라도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4·3사건 당시 무장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4·3 때 주민들을 학살하다 죽은 군인과 경찰은 희생자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군경의 토벌 대상이었던 무장대는 희생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들과 이들의 유족은 4·3 역사의 희생자가 맞다. 진정한 화해와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희생자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진상규명에 있어 미국의 책임이 매우 크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에도 우리나라 군의 전시작적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었고, 4·3 기간 군경에 이한 제주도민 학살은 모두 미국의 지도로 진행된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같은 목소리를 내는 국제적 시민의 연대는 확대되고 있다. 왜냐하면 4·3을 시작으로 이와 유사한 국가폭력 사건이 미국의 권력 내에 있던 다른 나라에서도 다수 발생했기 때문이다.

 

△ 4·3평화공원 기념관 초입의 백비, ‘백비’란 어떤 연유로 이름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출처: 제주다크투어)

 

제주4·3을 기억해주세요

 

4·3 뒤에는 아직 마땅한 이름을 명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7년 7개월간 발생한 4·3을 몇 글자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이다. 아직도 4·3의 역사를 왜곡하고 소위 ‘빨깽이’ 낙인을 찍으려는 가해 책임자들이 우리 사회 주류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4·3을 기억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절실하다.

 

몇 가지 4·3을 기억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다음에 제주도 간다면, ‘제주4·3평화공원’을 방문해야 한다. 평화공원 내의 기념관에는 4·3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잘 정리된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30분마다 해설사가 배치되어 무료로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기념관을 나오면 야외에는 위패봉안실, 위령탑 등 4·3의 역사를 상징하는 다양한 조형물과 위령시설이 있다. 또한 기념관 주차장 가까이에는 독일로부터 기증받은 베를린 장벽 일부를 볼 수 있다.

 

유명 관광지를 가서 멋진 자연경관과 함께 그곳의 4·3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다. 제주도에 첫 발을 딛는 제주공항, 제주항부터 4·3유적지다.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월정리 해변, 함덕 해변, 다랑쉬 오름, 표선 해변 등 제주도의 유명한 관광지 대부분이 4·3 당시 학살터였다. 아직 부족하지만 매년 4·3유적지 안내판 설치를 확대하고 있어 앞으로는 4·3유적지에 대한 정보도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도 다가올 4월 3일에는 4·3의 상징꽃인 동백꽃 배지를 달아볼 수 있다. 겨울에 빨갛게 폈다가 꽃 머리가 그대로 땅에 떨어져 바닥을 빨갛게 물들이는 모습이 흰 눈 위에 흐른 희생자들의 피와 유사하다고 하여 동백꽃이 4·3의 상징이 되었다.

 

△ 터진목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과 4·3 평화기행 참여자들(출처: 제주다크투어)

 

제주4·3은 우리나라의 역사다

 

1947년 3·1절 대회로부터 시작된 4·3은 분단에 반대하고 통일된 나라를 염원하던 제주도민의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제주도민만이 아닌 온 국민의 염원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4·3은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국민의 생명권이 무참히 유린된 역사다. 4·3의 엄청난 희생은 역설적으로 인간 생명의 고귀함과 인권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다. 광주와 세월호, 10‧29 이태원 참사에서 그랬듯이 국가와 정부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4·3의 진실과 올바른 의미를 알리려는 우리의 움직임은 대한민국이 인권과 평화, 통일의 나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다. 4·3 희생자들의 원혼과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인권, 평화, 통일의 나라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참고자료>

4·3기념사업위원회, 2018. 「4·3이 뭐우꽈」, 도서출판 각.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 https://www.jejudarktours.org/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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