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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고, 파견 노동자가 당면한 정의

[제3회 난생처음 노동문화제 수상작] 독후감 2등 일반부문, 추승현

등록일 2022년02월28일 14시5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단어가 주는 힘이 있다. 어떤 경우 그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일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중간착취란 주로 파견 업체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들이 하청 업체인 자신의 직장에서 임금을 떼인 경우를 가리킨다. 아니면 플랫폼 업체에서 지나치게 많이 수수료를 떼이는 경우도 중간착취에 해당할 수 있다. 사업상의 어떠한 이유로라도 중개수수료 이상으로 수수료를 받는 것도 중간착취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원청은 하청 업체가 무엇을 하든 책임을 하청 업체에 미루고, 하청 업체는 이것을 악용하면서 노동자들을 부린다.

 

중간착취는 착취에서 온 단어이지만 착취와는 엄연히 다른 단어다. 착취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고안한 단어로 생산 수단이 있는 사용자가 노동자들을 고용할 때 고정 임금에 대비되는 노동시간을 늘려 남은 잉여 노동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임금 착취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의 이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형태가 기본 구조로 자리 잡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중간착취일 것이다. 중간착취는 주로 파견 노동자가 생긴 이후로 그것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이 노동자의 급여를 갈취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원청은 안정적으로 인력을 공급받기 원하면서도 저렴한 가격으로 계약하기 원하기 때문에 인력을 공급하는 하청 업체들은 표면적으로 중개 수수료를 제로에 가깝게 제시한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하청업체에 가는 파이는 줄어들게 되고, 이에 따라 관리자는 파견 노동자가 가져가야 할 임금을 떼어간다. 이때 제도적으로 허점이 있어 아무리 관리자가 임금을 떼어가도 노동자가 얼마큼을 착복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며, 이것에 원청이나 정부에서 개입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착취는 관행으로 받아들여져 정규직과 파견직을 구분하는 현상을 낳았다. 파견법을 이후 파견직은 정규직이 받는 급여의 70% 수준으로 받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이는 단지 소속의 차이뿐만 아니라 관리자가 착복하기 쉬운 구조를 법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이 고착화되면 점점 떼어가는 비율이 높아지며, 파견 노동자들은 원청에서 지급하는 금액에 관계없이 낮아진 임금 정보로 공유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서로의 임금을 밝히는 것을 금기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임금 상승을 동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누군가는 그토록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면 그만큼 노력해서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어폐가 있다. 이런 파견 노동자에 들어간 경우 사회초년생도 있기 때문에 중간착취가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편 파견 노동자로 몰리는 사람의 경우는 대부분 경력 단절이나 은퇴로 인해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생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을 쉬이 관두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능력주의만을 내세워 그들이 원하는 만큼 자신의 몫을 성취했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경우는 단지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이웃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아버지는 용접을 전문 분야로 하는 건설노동자다. 예전에는 팀으로 주로 움직여서 활동했지만 지금은 의견이 맞지 않아 혼자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정년을 넘어서 큰 공사에 참가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건설 현장은 책에서도 언급된 중간착취가 빈번히 이뤄지는 곳이다. 건설노동은 일일 근로가 아닌 한 주로 팀으로 이뤄지는데, 만일 수습으로 일을 할 때는 일을 배운다는 명분으로 팀장이 돈을 떼어간다. 그렇지만 현장에서도 엄연히 수습의 역할이 있어, 다른 역할을 맡더라도 어떻게든 몫을 하기 때문에 인건비는 그대로 지급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임금을 떼어간다는 것은 역시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버텨야 기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수습은 어쩔 수 없이 버틸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나 자신도 건설 현장에서 몇 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보통 중개수수료는 10%를 떼기 때문에, 법정 중개수수료가 1%라는 사실은 책을 통해 처음 안 사실이다.

 

건설현장의 경우 하청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도급 계약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 끄트러미에 있는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 큰 건설 현장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건설노동자는 자신의 장비를 스스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봉고차나 화물차를 몰고 다닌다. 더군다나 작은 현장에서는 안전 관리가 매우 소홀히 이뤄지기 때문에 안전모를 차거나 안전 고리를 거는 등의 안전 감독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2인 1조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대부분 위험한 환경에 몰린다. 이런 식으로 건설 현장이 이뤄지는 이유 중 하나도 중간착취의 문제가 크다. 하청은 어떻게든 저렴한 가격으로 원청에 입찰하지만, 입찰만 되면 하청은 완성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 돈으로 다른 팀이나 기술자를 불러도 원청이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끄트머리에서 하청을 받는 도급계약자들은 일당이라도 벌 수 있다는 심정에서 일을 맡는다.

 

심지어 이런 과정에서는 관성적인 임금 체불이 이뤄진다. 건설현장의 팀장들은 대부분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간 임금을 체불한다. 실상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고 이뤄진 계약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항의가 어렵다. 설혹 신고가 가능하더라도 대부분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이기 때문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쉽게 그러기가 어렵다. 또 관련 업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일이 더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저항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이유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법은 기본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지 못하면 어느 개인도 보호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갈수록 세상의 규칙은 복잡해지고 법 자체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개인의 양심이나 시장 원리에만 호소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고, 개인의 이기심은 법망의 허점을 이용하여 사회를 유린한다. 나는 모든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모든 가치에는 노동과 같은 신성함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간착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노동의 신성함은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급여에 정당한 대가를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일한 만큼은 받아야 한다. 이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주장일까?

 

심사평

☞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 부당한 일을 설명할 수 없는 노동이 있다는 관점을 기반으로 ‘중간 착취’라는 새로운 단어를 살핀 방식이 좋았다

☞ 중간착취의 문제를 아버지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풀어냄

임욱영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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