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한국노총 제3회 ‘난생처음 노동문화제’가 나와 내 주변의 노동 이야기를 주제로 지난해 12월 열렸다. 이번 ‘난생처음 노동문화제’에선 웹툰과 노동수기 부문이 추가되어 기존의 동영상과 독후감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24개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한국노총 뉴스페이지 ‘노동과희망’(news.inochong.org)에서는 당선작들을 순차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송곳’은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들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도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은 무사히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데 그쳤던 노동자들이 함께 공부하고 연대하면서 점차 적극적으로 사측에 맞서기 시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어두운 현실 가운데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던 작품이기도 했다.
최규석 작가의 작품은 대형마트 까르푸 노조의 2003년 파업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당시 한국까르푸는 경영난에 봉착하면서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종업원의 상당수를 파견직으로 채웠으며, 정규직 직원들 역시도 사측으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존 직원들을 내보내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2003년과 지금의 현실은 얼마만큼 달라졌을까. ‘송곳’에서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노조를 결성하고 사측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는 분위기가 들불처럼 퍼져나가게 되었을까.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역시도 바뀌었을까. 그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목도하고자 집어 들었던 책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으면서 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송곳’에서 노동현실에 대해 강의를 들려주는 노동 상담소 소장에게 한 노동자는 푸념하듯 이야기한다.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떡해요? 다 본인 책임이지.”
그러자 상담소 소장은 이와 같이 답한다.
“패배는 죄가 아니오.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고. (중략)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단지 평범한 거라고. 우리의 국가는,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정말이지 그렇다. 전국의 간접고용 노동자가 346만 명으로 추산되는 시대에 이들의 노동 조건을 단순히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도 게으르고도 무책임한 답변일 것이다.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던 책 ‘중간착취의 지옥도’는 이러한 현실을 상세히 파헤치고 그러한 문제가 생기게 된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자 시도한 젊은 기자들의 값진 결과물이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우리의 노동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기형적 현실이 너무도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부조리한 노동 현실로 인해 그동안 각 분야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비극적 죽음이 잇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들은 개별적 사건으로서 뉴스의 한 꼭지로 등장했을 뿐 대대적인 변화를 이끄는 도화선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소속이 불분명한 프리랜서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작업 환경이 파편화되어 ‘송곳’에서처럼 한 목소리로 연대하기도 어려웠으며, 설사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은 원청에든 하청업체에든 제대로 된 발언권을 갖지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이즈음의 이른 아침에도 출근길 중간쯤에 있는 인력사무소 앞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엉거주춤 서있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재난의 여파는 사회의 가장 낮고도 약한 틈을 파고드는 것일까. 코로나 19로 인한 재난 상황 속에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의 대부분도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 책에서 인터뷰에 응한 수많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이 월급의 수십 퍼센트를 용역업체에 떼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용역업체는 원청에서 지급받은 인건비 내역을 노동자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현장에서 일하다 겪게 되는 사고 등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관리비 명목으로 수십 퍼센트의 임금을 떼어가는 행위는 횡령이나 절도에 다름없는 행동임에도 현재 법률상 용역업체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근거는 없는 상황이다. 용역업체는 원청과 ‘도급계약’을 맺고, 노동자와는 ‘근로계약’을 따로 맺게 되는데 업체가 얼마를 떼어먹든 최저임금만 지키면 그 모든 중간착취가 합법으로 취급되는 탓이다. 2016년 지하철 2호선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구의역 김군’도, 2018년 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고(故) 김용균 씨도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임금을 착취당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기본급이 오르자 그 외의 급여 항목을 줄이는 방식으로 월급을 동결시키는 꼼수도 횡행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두 자릿수 인상률을 기록하던 시기에도 월급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노동자들이 존재해온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팍팍한 삶에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노동자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더군다나 수많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일하더라도 연차가 쌓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의 용역업체가 노동자와 1,2년마다 근로계약을 새로 맺고 있으며, 소속업체가 바뀌면 노동자들은 모두 새 회사의 신입사원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사용주(원청)-고용주(용역업체)-노동자’로 구성되는 고용 구조의 먹이사슬 안에서 가장 하위에 속한 노동자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노동 현장에서의 고충 역시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처지이다. 노동자가 행여라도 원청을 향해 불편한 발언을 할 경우 계약 유지에 불리함이 생길 수 있기에 용역업체에서는 사실관계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노동자를 비난하기 바쁘고, 관리비 명목으로 수많은 돈을 떼어가면서도 노동자에 대한 지원이나 고충 처리 등에는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 조건은 노동자로 하여금 열악한 일자리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서도 무조건적으로 그것을 감내하거나 체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는 기자들이 취재한 수많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었다. 일부는 현실을 애써 파헤치려 하지 않고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일부는 고용주의 언어를 내면화하여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용기 있는 일부는 진실을 알고 싶어 했으며, 기자들에게 자신이 처한 노동 현실의 민낯을 낱낱이 알리며 제보 메일을 통해 이러한 답답한 현실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호소를 보내오기도 했다. 책 속에서 만난 한 은행 경비 노동자의 편지는 마음에 묵직하고도 먹먹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은행원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비슷한 대우도 바라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관리’ 명목으로 은행 경비원의 노동 대가를 중간착취 당하지 않고 온전히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아니더라도 매년 반복되는 재계약과 언제 마주할지 모르는 지점 통폐합에 따른 계약 해지의 불안감에서 벗어나 일하고 싶습니다. 저는 안정된 고용 환경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간착취자들의 불법 행위를 근절하고 노동자들의 실질적 근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섬세한 법안의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때로는 선의로 제정한 법률이 외려 노동자들을 사지로 모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기에 입법자들은 법률의 개정으로 인해 변화될 노동계의 현실을 사전에 다각도로 검증해보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몇 년 전 현대제철 불법 파견 판결 직후 사업주들이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불법 파견의 근거만을 없애려고 하면서 결국은 원청이 중간착취를 하는 하청을 감독하는 일마저 그만두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는 법의 취지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사업주들의 이윤 창출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원청의 감독이 사라지면서 하청업체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는 더욱 열악해졌으며 모 자동차 회사의 공장에서는 하청업체가 기존에 쓰던 마스크 대신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값싼 마스크를 지급하면서 노동자들이 마스크 안으로 시꺼멓게 밀려 들어오는 분진을 고스란히 들이마셔야만 했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이기도 할 한 노동자의 얼굴에 까맣게 뒤덮인 분진은 그가 노동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치욕과 위험을 고스란히 시각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이라는 것이 본디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활동일진대, 자본의 논리는 인간의 안전과 건강을 우선순위의 최하위로 밀쳐내 버렸다.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일을 하다가 몸이 다쳐도 산재신청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원청업체도, 하청업체도, 열악한 노동 조건 하에서 병든 몸과 마음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결국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결국 고스란히 국가에 떠넘겨지게 된다. 기업은 영업 활동으로 인한 이익을 취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책임의 의무에서 태연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아무런 관리와 책임 없이도 ‘사람 장사’를 통해 억대 연봉을 챙기는 하청업체의 대표들은 농업이 중심이 되던 과거 우리 사회에 존재하였던 마름이라는 직책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지주와 소작농의 중간자 역할을 하며 소작농에게 얼마만큼의 땅을 떼어줄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 권한을 가짐으로써 갖은 농간을 부렸다. 소작농은 일 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를 짓고서도 식구들이 먹고 살 최소한의 곡식마저 제몫으로 남기기 힘들었다. 곳곳에서 벌어진 소작쟁의는 불합리한 구조에 억눌려 살던 농민들의 처절한 절규였다. 시대는 다르지만 마치 평행이론처럼 현재 우리 사회와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 많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부분이다.
원청업체는 노동자를 책임질 필요가 없고 하청업체는 책임질 능력이 없다며 어깨를 으쓱하고 마는 세상. 과연 이런 건강치 못한 세계가 얼마나 오래 목숨을 부지해갈 수 있을까. 누구도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 어려울 것이다. 인력사무소에서, 하청업체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불합리하게 착취하는 구조는 최첨단의 모바일 플랫폼에서까지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여느 나라보다 각 분야에서 값싸고 빠르게 편리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우리나라의 장점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혹한 노동착취 구조가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건강, 안전을 갉아먹으면서 일구어낸 결과물은 아닐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노동시장의 중간착취 문제를 기사를 통해 공론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국회의 입법자들을 만나 착취를 근절할 수 있는 법안 발의를 요구하는 실천적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자들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과 관계부처에서 내보인 반응은 너무도 맥 빠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남 자체를 회피하거나 고작해야 ‘신중히 검토하겠음’이라는 이도저도 아닌 답변을 내놓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기자가 용기 있게 내민 이 도전장이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으며 방송과 SNS에 회자되고 일부 정치인들이 관련 정책을 내놓기도 하는 것을 보면 희망을 버리기엔 아직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착취에 대해 고발한 책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번 이러한 논의가 거듭된다면 분명 새로운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날도 오게 되지 않을까.
남보라, 박주희, 전혼잎. 이 세 명의 뚝심 있는 기자들은 우리사회에 번연히 존재하는 것을 알면서도 직시하지 못했던 교묘한 지옥도를 우리 앞에 꺼내어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심각성을 실체화 하였다. 앞으로도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겠지만 이들과 같이 우보천리로 우직하게 걸어가는 이들이 있는 한, 엄정한 법의 질서 앞에서 중간착취의 사슬이 끊어지게 될 날은 반드시 오리라고 본다. 필경사 바틀비가 그러했듯, 냉엄한 자본주의 질서 앞에서도 자신 앞에 닥친 부조리에 대해 “하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를 당당히 외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심사평
☞ 원청과 하청의 중간착취 구조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글 / 책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며 성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