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책을 뒤로 돌리면 신영복 교수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을 훑어보는데 책을 읽기 전의 내 눈에 띄었던 말은 큰 따옴표로 강조되어있던 저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도 전태일을 잘못 읽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말 아래에 쓰인 부연 설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전태일의 죽음이 아닌 삶에 집중한다는 것.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옮겨오는 것.
나에게 전태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나의 전체의 일부로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이었다. 난 그 마음이 전태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언급되었고, 전태일 또한 그의 좌우명이라고 할 정도로 평생 이 마음을 품고 살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게라도 적대적인 현실은 곧 모든 인간에게 적대적인 현실이며, 한 사람의 이웃의 신음소리는 곧 전태일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아픔이었다.(p.201)”
사는 동안에도 전태일은 윤동주 시인처럼 이 마음에 자신을 비춰보며 괴로워했고 죽음을 결심했던 유서에는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고 하며 이 세상의 모두가 자신임을 되뇌었고 죽으면서까지 자신이 못 이룬 여공들의 행복을 위해 힘써 달라 간절히 부탁했다. 진심으로 남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과 같아서, 미련하도록 착해서 죽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자신이 재단사로써도, 바보회와 삼동회의 회장으로써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던 고통을 자신의 고통스런 죽음으로 대신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 예쁜 마음을 간직하고만 있는 것도 안 된다. 간직하고 그 마음대로 사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교육, 특히 대학교 입학과열로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무의미함을 느끼고 다른 것으로 고치고자, 바꾸고자 학교를 나왔다. 그 뒤로 평생 살아가며 필요할, 어쩌면 지금도 필요한 의미 있는 지식을 책을 통해 배우고 있다. 물론 교육을 바꾸기 위한 지식들도 접하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장기표 씨의 마지막 글, 이 책의 저자인 조영래도 전태일도 남을 위해 공부했기 때문에 천재성을 얻은 것이라는 글을 보고 나에겐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배우는 것이 아직 많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교육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정말 없다 해도 전태일이 부딪힌 노동의 문제만큼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전태일은 여공들을 먼저 살피고 돌봤다. 전태일은 그래도 움직였다. 더 세게 부딪히고 더 사람을 모으고 더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그랬다. 나와 전태일의 차이는‘사랑’이었다. 누구를 위하여 이 일을 하는가. 전태일은 사랑으로 공부하고 사랑으로 부딪혔다.
나 또한 앞으로 학교에서 12년을 보낼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지만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공부하거나 책을 보거나 행동을 취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나의 일부라는 전태일의 마음을 품는다면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힘든 부분을 내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주치지 않을 것이란 법은 없다. 힘들게 싸워나갈 나를 위해, 그들을 위해 조금은 덜 힘든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생겼다. 먼저는 하루빨리 전태일박물관에 가고 싶었다. 책을 다 읽고 앞쪽에 있던 전태일의 모습을 한 장 한 장 눈에 담아보았는데 부족했다. 그의 삶과 사진과 글을 더 많이,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또 찬바람이 불때마다 전태일의 춥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는 2021년 어린 전태일들에게 월드비전을 통해 따뜻함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동생들도 함께하자고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설득 중이다. 직접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싶다.
비록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그의 삶을, 더 힘들었던 여공들의 삶을 느껴보고 싶다. 지금 생각해놓은 것은 텔레마케터인데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이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는 학교에서 노동에 대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노동자가 될 아이들이 근로기준법으로 보호받는 노동권에 대해 정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그 누구에게도 노동권을 침해받지 않고 혹은 침해하지 않고 일하는 사람으로 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꼭 이룰 것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그가 죽어가는 시간을 서술해놓은 부분이었다. 전태일은 삶의 마지막에 상상할 수 없을 고통의 시간을 너무나 오래 견뎠다. 그가 분신자살을 기도하는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꽤 긴 시간이 서술되어있었는데(그 전의 나는 분신자살을 기도한 그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줄로 알고 있어서 더욱 길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남기는 말들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책장을 어서 넘기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가 죽기 전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는데 사실 6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사회의 모든 기업들이 전태일이 원하던 모범기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 노동문제를 다룬 책을 몇 권 봤었는데 다 읽은 뒤에 남겨진 것은 법이 잘 적용되지 않는 현실뿐이었다. 뉴스에서도 일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봤었다. 뉴스에 보도되지 않아도 직업병을 앓고 있거나 법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넘칠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전태일이 몸담았던 재봉 사업이 그때와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안타깝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 모범기업, 전태일이 꿈꿨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기업도 큰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고 그렇지 않은 기업이 있다면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힘은 정말로 무시할 수 없기에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나도 전태일을 알았고 그가 바라던 모습으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심사평
☞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글은, 어떻게든 진지하게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 전태일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