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가 막을 내렸다. 여러 법이 통과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국회에서 가장 끈질기게 논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연금개혁안이었다.
야당은 협상할 수 있는 안의 최대치까지 제시하면서 작은 모수개혁이라도 성과를 내자고 법안 통과를 촉구했지만, 여당은 22대 국회에서 논의해보자며 연금개혁을 끝내 무산시켰다. 국민의 노후가 달린 연금개혁이 또 무산되면서 국민의 노후불안은 가중하고 있다.
▲ 5월 22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국민연금 공론화 결과에 따른 연금개혁 촉구 기자회견’
무능한 정치가 빚어낸 ‘연금 잔혹사’
이번 연금개혁과정을 전반적으로 돌이켜보건대, 입법부 중심의 논의과정은 길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이 끝낸 최악의 결론이라고 총평할 수 있다. 여야 정치가, 정당이, 국회가 해야 할 역할을 했는지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와 국회는 첫 출발부터 제대로 된 연금개혁을 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낳았다. 윤석열 정부는 이른바 3대 개혁 중 하나로 ‘상생의 연금개혁’을 추진하겠다면서 공적연금 개혁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며 마치 정부가 직접 책임지고 이를 수행하는 것처럼 한 바 있으나, 실제로는 국회가 2022년 10월 연금특위를 출범할 때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작년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을 통해서 여러 재정 시뮬레이션이나 논의결과를 종합하여 발표하긴 했지만, 정부는 구체적인 개혁 방향에 대해 전혀 제시하지 않아 사실상 연금개혁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없음을 내비쳤다.
여당은 윤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연금특위를 국회 내에 설치했지만, 국회의원이 아닌 전문가를 중심으로 운영했다. 민간자문위원회를 중심으로 전문가 의견을 검토하는데 매우 긴 시간을 낭비했고 이 과정에서 가입자단체의 구체적 의견을 조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낸 연금특위는 한 차례 기한을 연장하는데, 여야가 합의하고 21대 국회 잔여임기까지 계속해서 활동하기로 했으며, 그나마 성과를 내기 위해 공론화라는 과정을 채택했다.
올해 1월 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하고 2월 이해관계자 공청회, 3월 의제숙의단 워크숍, 4월 시민대표단 의견수렴 등을 거쳐 연금개혁에 대한 시민의 의견을 확인했다.
이 긴 과정을 거치고도 여야는 최종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정부와 여당의 연금개혁에 의지 없음이다. 개혁하겠다고 주장한 것이 정부와 여당인데, 그들은 보수 진영에게 불리한 결과가 예상되고 야당의 휘둘리면 안 된다는 정치적 이유로 국민의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포기했다.
시종일관 연금개혁에 대해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심지어 여당이 제안하여 추진한 공론화위원회의 결론에 대해 여당 간사는 그저 설문 조사 결과 중 하나라는 식으로 대하고 시민의 뜻을 깡그리 무시했다. 무려 2년여간 논의해 온 모수개혁이 부족하니 22대 국회로 넘겨 구조개혁이라는 더욱 어렵고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보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야당도 노후소득보장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론화 과정 이전까지 더불어민주당이 적극적으로 공적연금강화에 대한 이슈 제기를 한 바가 없다. 노동계나 시민단체가 제기한 토론회를 공동으로 개최하고 가끔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는 했으나, 연금개혁 이슈를 주도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을 함께 올려야 한다는 시민의 뜻이 확인된 이후에서야 이슈파이팅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여야가, 정부와 국회가, 우리의 정치가 지금의 ‘연금 잔혹사’를 만들어 낸 공범이라 할 수 있겠다.
공론화의 주인공은 전문가와 기울어진 언론에 현혹되지 않은 시민
하지만 공론화위원회는 매우 뜻깊은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만하다. 결론을 떠나서 공론화 과정 자체에 대해 어느 정당이나 진영이든 쉽사리 문제를 제기할만한 부분이 없다. 자문단 구성, 이해관계자 워크숍 진행방식, 시민대표단 운영 등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확인하기 위한 모든 절차를 여야 합의 하에 진행했다.
전문가와 언론은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재정안정화를 주장하던 전문가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여러 안들(보험료율 15%, 수급개시연령 67세로 상향, 자동조정장치 도입 등)이 제시했고 보수언론은 늘 이에 화답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현실성, 사회적 수용성 등을 고려했을 때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타당하지 않으면 가차 없는 결론을 내렸다. KDI의 한 연구원이 급조하여 만든 ‘구연금 폐지, DC방식 신연금 도입’은 아직도 보수언론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지만, 시민은 지금도 눈여겨보지 않고 있다.
굳이 국민연금제도를 버리면서 급여 수준이 확실치도 않은 새 제도를 만들 필요가 없으며, 이행비용이 수백조에 달한다는 부분이 사실상 몽상에 가까운 탓에 시민들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차원에서 시민이 내린 결론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연금개혁과 관련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히 재정안정화를 주장했던) 전문가들과 보수언론의 편향적 주장, 근거 없는 발언, 왜곡된 보도는 시민들의 의사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공론화위원회 결과보고서가 시민의 판단에 전문가나 언론의 도움은 크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시민들은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시민 간 열띤 토론을 통해 자신만의 이해를 구축해나갔고, 공적연금이 지금보다는 더 강화될 필요가 있기에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이 동시에 제고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도 시민들의 이러한 의사결정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향후 연금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22대 국회에서의 연금개혁은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이 실패한 결과, 22대 국회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22대 국회에서 마저 공적연금강화를 위한 입법 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정치가 국민의 노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빠른 시기 내에 모수개혁이라도 달성할 수 있도록 정치가 최소한 역할을 해야 한다. 구조개혁은 모수개혁 이후에 이어져야 한다
국회를 가만히 두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노총이 중심이 되어 노동·시민사회 진영이 연대를 통해 국민연금 중심의 공적연금강화 입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략과 전술을 마련하고 촘촘한 실행계획을 세워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