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국민연금이 시행된 1988년 이후 1998년과 2007년의 두 차례에 걸쳐 연금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개혁은 전체적으로 재정안정에 치우쳐 노후소득보장기능을 크게 약화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소수의 목소리에 그쳤다. ‘기금 소진되면 연금 못 받는다’는 ‘기금소진=연금미수령’의 공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금소진=연금미수령론’은 해외 사례와 맞지 않는 잘못된 것이다. OECD 회원국을 보면 공적연금기금을 GDP의 10% 이상 규모로 쌓아둔 나라는 10여 개국에 불과하고 한국 국민연금기금은 GDP의 45%로 세계 1위이다.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은 공적연금기금이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영국의 연금기금은 GDP 1.8%이며 독일은 1.2%, 스페인은 0.2%에 불과하다. 이들 나라는 우리 기준으로 보면 기금이 소진된 것이지만 그 나라의 학자들이나 언론이 ‘기금소진=연금미수령론’을 말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 10월 26일 오전 10시, 한국노총 대회의실(6층)에서 열린 ‘연금행동 대안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국민연금은 민간보험이 아니라 공적연금이다
흔히 국민연금은 내가 젊을 때 낸 보험료를 원금으로 하고 거기에 기금수익을 붙여 퇴직 후에 돌려받는 것 즉 민간보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 국민연금 받는 노인들은 그들이 젊을 때 낸 보험료에 이자까지 받는 게 아니라 현재의 청·장년들이 매달 내는 보험료에서 받는다. 지금 보험료를 내는 청장년들은 그 보험료가 내가 나중에 받을 돈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노인들에게 연금으로 나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청장년들이 퇴직하면 그때는 그 당시의 청·장년들이 내는 보험료에서 연금을 받는다. 국민연금을 세대 간 부양제도라고 하는 이유이고 외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기금은 어떻게 해서 쌓이는가? 그것은 국민연금을 처음 도입할 당시에도 인구 고령화를 예상했고 고령화가 되면 보험료가 올라가야 하는데 그 올라가는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기금을 쌓도록 했고 또 적어도 2030년까지는 보험료 수입이 급여지출보다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청장년들이 내는 보험료는 현재의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도 남기 때문에 그 남는 돈이 기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금급여지출이 보험료 수입보다 많아지게 되면 보험료도 올려야겠지만 기금도 연금지급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금을 연금지급에 사용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에 기금은 점차 줄어들고 그렇게 해서 보험료 올리는 속도를 조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금기금은 완충 기금이고 완충의 역할이 필요 없어지면 독일처럼 매우 작은 규모가 될 수도 있다. 기금소진과 연금지급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인구 고령화 속도를 보면 완충 기금의 역할이 당초 예상보다 더 긴 2070년대까지 필요할 것으로 보여 그때까지는 기금을 유지해야 하므로 보험료를 지금보다는 좀 더 올려야 한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려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그동안 두 차례의 연금개혁을 하면서 재정주의적 접근에 지배된 나머지 급여 수준을 너무 급격히 떨어뜨렸다. 그래서 현재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OECD 평균의 74%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소득대체율로는 노후 최소생활비 124만 원의 53% 수준만 보장이 된다. 20년 이상 가입한 사람들도 평균적으로 104만 원을 받게 되는데 이 금액조차 노후 최소생활비에 미달한다. 이렇게 해서는 인구 고령화 시대를 버텨낼 수가 없다. 국민연금으로 노후 최소생활비를 보장하려면 소득대체율이 현행 40%에서 최소한 50%로 올라야 한다. 그렇게 하면 기초연금을 합쳐서 국민연금으로 노후 최소생활비를 보장할 수 있다.
재정주의자들은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기금소진이 빨라지고 미적립부채가 늘어나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한다. 기금소진 관련해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금이 없이 공적연금을 운영하는 나라가 훨씬 더 많고 또 연금기금은 완충 기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재정주의자들은 기금이 소진되면 미래세대 부담이 늘어난다면서 미적립부채를 거론하는데 이 미적립부채는 매우 잘못된 개념이다. 이는 다음의 예를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부부가 자녀를 낳았다고 하자. 그 경우 자녀를 대학진학까지 대략 20년간 키우는데 필요한 돈을 계산할 수 있다. 그 금액은 아마 억 단위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억 단위의 돈이 미적립부채이다. 즉, 우리는 자녀를 낳는 순간 수억 원의 미적립부채를 지게 되는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데 필요한 수억 원의 돈을 미리 쌓아두고서 자녀를 낳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를 낳은 부모는 매달 일해, 돈을 벌고 그 일부를 자녀 양육에 쓰는 것이지 20년 치 양육비를 미리 미적립부채로 계산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국민연금 버스의 크기도 키우고 엔진 성능도 개선해서 모두 타고 가자
국민연금은 노후라는 긴 터널을 지나는 버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버스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엔진 성능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것은 국민연금이라는 버스의 크기를 키우고 엔진의 성능을 개선하는 것과 같다. 재정주의자들은 회사에 엄청난 돈을 쌓아두고도 그 돈이 고갈된다고 버스 크기도 못 키우고 엔진도 좋은 것으로 못 바꾼다면서 버스 탈 돈만 더 내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노후는 길어지고 버스에 타야 할 사람은 많아지는데 버스 크기를 줄이고 엔진도 갈지 않으면 어차피 노후를 지내야 하는 사람들은 국민연금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타야 할 것이고 다른 버스를 못 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노후라는 터널을 지나는 도중에 지쳐 쓰러질 수도 있다.
그동안 ‘기금소진=연금미수령’ 공포를 조장하면서 보험료를 당장 크게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런 주장으로는 보험료를 한 푼도 못 올렸을 뿐만 아니라 재정안정도 제도 신뢰도 기하지 못했다. 반면에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2019년 경사노위 연금특위 때 소득대체율 45%에 보험료 12%의 합의를 냈고, 이번에도 소득대체율 50%에 보험료 13%의 합의를 도출했다. 소득대체율 50%에 보험료 13%를 추진하면 올해의 재정계산보다 수지 적자와 기금소진 시점을 모두 6년 더 늦출 수 있다. ‘기금소진=연금미수령’ 공포를 조장해온 재정주의자들은 그동안 수지 적자와 기금소진 시점을 단 1년도 늦추지 못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소득대체율과 보험료 인상의 동시 추진에 두 번이나 합의함으로써 우리 사회 연금개혁의 길을 이미 제시했다. 그리고 보험료를 이번에 올리고 그 후의 재정 추이와 사회경제적 변화를 평가하면서 국고지원 등을 포함한 추가 재원 마련을 다시 추진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기금소진=연금미수령’ 공포론을 중단하고 버스의 크기도 키우고 엔진도 바꾸면서 버스요금을 단계적으로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두 국민연금 버스를 타고 노후를 지나는 것이다. 연금개혁에는 공포론이 아니라 햇별정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