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노사정기구도 노사 간 정상 교섭이 중심이지만, 다양한 시민사회 구성원이나 전문가가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전문가가 압도적 비율인 해외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가령 벨기에는 노사 대표만 의결권을 가지는 전국노동위원회(CNT: Conseil national du travail)가 있다. 노사 전문가가 정책 자문을 진행하는 중앙경제위원회(CCE: Conseil central de l’économie)는 별도로 운영된다(손영우‧임상훈, 2020:251). 네덜란드 사회경제위원회(SER: SociaalᐨEconomische Raad)는 노‧사‧전문가가 동수로 참여한다.
프랑스는 2021년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 시민참여가 확대되며 233명의 위원 중 정부위원은 제외되고 전문가는 40명이다. 나머지 위원은 노·사를 포함해 모두 이해관계자 집단이다(손영우, 2021;2018). 일본 후생노동성 노동정책 심의회는 노·사·공익 10명씩 동수 참여가 원칙이고 정부는 회의체 운영 실무진이지 결정 주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사의 협의와 조정을 목표로 하거나, 시민 참여를 늘리고자 만들어진 위원회조차 이해당사자보다 전문가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왜일까? 그리고 이는 노동조합 배제와 어떻게 연결될까? 이유는 크게 두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위원회가 정부 주도 정책결정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곤 하니,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특정 방향으로 회의체를 이끌고자 할수록 이해관계자보다 전문가 참여를 늘리는 경향이 있다. 둘째, 한국의 자율적 결사체 비율이 낮다 보니 회의체에서 당사자 이익을 대표하고 표출하며 대등하게 논의를 이끌 수 있는 민간위원의 안정적 구성이 어렵다. 이 과정에서 관 주도 결정을 가장 비판하며 이해당사자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조직과 체계를 갖춘 위원은 노동조합 대표인 경우가 많다. 정부 방향대로 회의체를 이끌고자 할수록 조직노동, 특히 총연맹은 가장 배제하고 싶은 상대이다.
2. 정부 주도 정책 결정을 위한 도구로서 위원회
우리 위원회가 민간 집단, 혹은 갈등적 사회세력 간 합의 도출이나 내용의 집합보다 정부정책의 정당화와 정책 집행의 효율적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정상호, 2003:296-297). 실제로 2023년 국감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단체를 정부위원회에 넣을 수 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회의체에 참여한 이해당사자들은 단체가 의견은 말할 수 있지만 단지 ‘참고’일 뿐이라며 위원회가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계속되어왔다(정영국, 1995:150). 그런데 과거에는 공무원이 위원회를 직접 주도하며 관주도 결정을 꾀했다면 지금은 전문가를 활용한다. 정부가 직접적인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다양한 시민사회와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했다는 명분을 취할 수 있어서다.
이 점은 노사정위원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사실 1998년 노사정위원회가 처음 출범할 때만 해도 노사위원은 동수였다. 그런데 3기 노사정위부터(1999년 9월) 정부·공익위원 숫자가 대폭 늘기 시작했다. 물론 직접 의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하부회의체에 노사를 제외하고 운영하는 연구회나 포럼이 늘어난 이유도 있다.
다만 전문가 중심 연구회 시작점이 노무현정부의 ‘노사관계 발전추진위원회’란 자문위원회였고 이후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7) 나아가 보수정부가 들어서며 노사가 빠진 연구자만으로 구성된 연구회나 포럼이 늘어난다. 물론 연구회나 포럼은 민감한 의제에 대해 합의보다 이해당사자들이 사전에 의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도 있으므로 노사동수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학회가 아닌 노사정 연구회에 전원 연구자만으로 구성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명박정부에서 노사를 제외한 5개 연구회가 생겨났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노사 없는 연구회가 7개로 늘어난다.8) 임금체계 개편·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등 가장 첨예한 쟁점을 다루면서도 정작 이해당사자인 노사를 배제해 연구회를 운영한다.
사실 이런 정책 과정이 그리 낯설지 않다. 지난 2022년 8월부터 4개월간 운영된 ‘미래노동시장연구회’ 역시 12명 전원이 교수다. 노동시장개혁안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노사 당사자는 제외했다. 이미 정부가 구상한 노동시장 개혁 방향에 맞추어 정당화 논리를 만들 수 있는 ‘연구회’라는 외피가 필요했다는 점은 이후 정책 내용을 보아도 확인이 가능하다.
실상 위원회에서 전문가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전문성을 살려서 의제를 논의하거나 중재하는 역할만이 아니다. 아무리 노사추천과 의견을 청취해도 최종 임명권을 가진 이는 어디까지나 행정부다. 위원장은 정부 코드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임명되기 쉽고, 정부 방향에 맞출 수 있는 위원이 더 많이 임명될 가능성도 크다.
더욱이 한국 지식사회는 점점 행정부가 연구자에게 용역연구, 산학협력 등 여러 명목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쉽게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국정감사 때면 고용노동부와 산하기관의 위원직을 맡고 있는 특정 교수에게 연구용역이 집중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9) 이런 환경에서 정부위원회가 전문가의 또 하나의 ‘지대추구(rent seeking)’의 장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방지하기란 쉽지 않다. 연구자 개인의 윤리에만 기대하기 어렵다.
3. 갈등 없는 민주주의, 조직 빠진 시민사회에서 노동조합은 불편한 존재
물론 모든 이유가 국가와 정부의 의도만은 아니다. 노무현정부는 위원회에 시민단체 추천위원 20% 이상을 포함시키며 관료정치를 극복하겠다는 목표가 분명했다. 시민사회 참여를 확대하려는 계획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문가 참여로 귀결되었다. 이는 한국에서 ‘시민사회’란 개념을 조직·집단·이익·갈등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취약한 것과 연관된다.
본래 시민사회란 다양한 가치와 이념을 가진 시민들의 ‘사회집단’, ‘조직된 결사체’가 자신의 이익과 열정을 증진하기 위해 ‘갈등’하고 문제를 논의하는 공간을 말한다. 즉 공적 권력이 행사되는 국가와 가족·기업과 같은 사적 생산 단위와 구별되는 중간 지대를 일컫는 것이지, 원자화된 ‘개인’의 ‘중립지대’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갈등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보다 학자들조차 이를 억제 또는 숨기거나 해소하고 극복할 것에만 관심을 둔다. 시민사회를 갈등이 표출되고 집단 간 충돌이 일어나는 역동의 공간으로 이해하지 않으니, 정부위원회의 ‘거버넌스’를 논하는 학자조차 정태적 과정 관리나 협력부터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가 어떤 이해를 가지는지 충분한 ‘표출’이 있어야 협력도 가능하다. 어떻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는지 알아야 첨예한 갈등 끝에 조정도 존재할 수 있다. 이해관계의 조정 없이 ‘답’만 강요하거나 오히려 강자와 자본의 가치를 ‘중재안’인 것처럼 포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아가 시민사회에 ‘조직’이나 집단의 의미도 취약하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전문가 중심의 시민운동과 노동자·농민 등 생산자집단의 운동이 분화되며 시민사회를 노동조합과 같은 생산조직을 제외한 시민운동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생겼다.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조차 시민의 의사와 참여,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조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결사체와 조직, 집단은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 행위자다. 시민의 ‘자율성’이나 ‘참여’를 위협하는 가장 큰 도전은 막대한 규모의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권력 효과다. 대규모 ‘법인 자본주의’와 ‘국가 관료제’로 대표되는 거대 조직이 엄연한 시대에 순수한 개인만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허상에 가깝다. 개인의 힘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특히 약자에게 집단과 결사, 조직은 최고의 민주적 수단이다. 약자일수록 숫자의 힘으로 조직하고 집단이 돼야 강자를 견제할 수 있고 자율성도 발휘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자율적 결사체 비율이 낮다는 점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4%에 불과하다고 대표성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는데 다른 집단과 비교하면 형편이 나은 편이다. 사용자단체 가운데 사업체조직률을 따져보면 중소기업중앙회가 10.8%이고, 한국경총은 0.07%, 대한상의는 0.3%를 포괄하고 있을 뿐이다(황선자, 2023). 노사단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실태조사’의 한국 시민의 단체 참여 실태를 살펴보면, 직업이나 계층, 지역 이익을 표출하고 결사하는 단체에 참여해 활동하는 시민 비율이 극히 낮다.
대체로 동창회나 동호회, 종교단체 같은 사적 단체 참여에 치중되어 있다. 직능단체 참여자는 5.3%, 지역사회 모임은 8.5%, 사회적 경제조직은 3.6%, 시민단체 참여는 3.4%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한국행정연구원, 2022: 48-49).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위원회에 사회 부문 이익을 포괄할 수 있는 단체참여자를 참여시키려 해도 구성 자체가 쉽지 않다 보니 가장 안전한 선택이 대학 교수 등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혹은 위원회에 참여하는 민간위원도 당사자 이익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표출하고 조직적 체계를 갖추어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눈에 띄는 존재이지 않을 수 없다. ‘갈등’을 다루고 게다가 조직이다. 사회를 그간 지배해온 기업권력이나 관료제와 불협화음을 내는 것도 꺼려하지 않는다. 정부위원회의 운영 관행이나 위원장의 회의 진행에 따르지 않거나 의제 선정부터 회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 노동계 사람이 특별히 모나서가 아니다. 노조 선출직의 경우 위원회에서 자칫 잘못된 결정을 하면 재임이 어렵거나 탄핵의 위험성도 있다. 태생적으로 막대한 정치적 책임이 따른다.
반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거나 체계 없는 단체의 구성원일수록 ‘다양한’ 이해를 대표한다는 책임성은 전적으로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에 좌우된다. 이견이 있어도 굳이 불편하게 불협화음을 자처할 유인이 크지 않다. 정부 입맛대로 위원회를 이끌고 싶을수록 노동조합은 가장 빼버리고 싶은 존재이기 쉽다.
4. 시민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노동자 배제의 정치
그런데 갈등과 충돌로 회의가 시끄럽고 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 두려워 이해관계자가 논의에서 빠지면 어떻게 될까?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없는 정도가 아니다. 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결정도 너무 쉽다.
최순실게이트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국민연금 기금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해 동원되며 막대한 손실이 있었다. 당시 손실액은 참여연대 분석에 따르면 무려 5,200~6,750억원에 달한다. 부당한 직권 남용 혐의로 문형표 전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책결정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 법원을 통해 인정된 것이다.
당시 노동계를 비롯해 이해관계자들이 추천한 전문가들이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이들이 처리할 안건이었다. 해당 내용이 통과되지 못할 것이 예상되자 아예 위원회 안건에 올리지도 않고 공단 내부의 투자전문위원회에서 결정해 처리해버렸다. 즉 노동계 추천 전문가들이 참여했으나 정부 고위직이 위법행위를 공모함에 따라 시민 전체의 노후 자금을 위협하는 위험한 결정을 막기 어려웠다.
그런데 현 정부는 법원조차 인정한 보건복지부의 잘못된 결정을 부인하는 검사 출신 변호사를 상근전문위원으로 임명했다. 양대 노총을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제외시킨 것이다.10) 그리고 기금운용에 있어서 민주노총의 위원을 해촉시키는 등 양대노총의 개입력을 계속 악화시키려 한다.
Ⅳ.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
정부위원회에서 노동 몫을 없애거나 총연맹 대표를 제외하는 결정은 윤석열 정부의 대표적인 노조 배제와 탄압 정책이다. 대다수 일하는 시민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고 살아가려면 다음과 같은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가 제기된다.
첫째, 정부는 총연맹을 위원회에서 배제하는 명분으로 양대 노총 독점을 깨고 위원회 문호를 넓힌다는 논리를 내세우는데 정부위원회 배제가 가장 하층 노동자의 삶부터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적극 제기해야 한다.
참여뿐 아니라 결정에도 비용이 든다. 누군가는 정보처리와 해석을 통해 불확실성을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게 조직이다. 상당수 정부위원회는 매우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다룬다. 회의체에 오랫동안 수십년 같은 의제를 다루며 지원‧참여하는 실무진이 있다. 혹은 그런 전문가를 알아보고 추천한다.
가령 최저임금위원회는 언론 보도에는 결정된 액수나 고용효과 정도가 보도된다. 그런데 실제 위원회에 참여하는 근로자위원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실무진은 위원회를 둘러싼 각종 법적 쟁점과 실태, 관련 제도 및 법률의 국가별 차이, 결정 기준의 구체적 산출 근거와 활용지표의 국제기준, 심의에 활용하는 통계별 조사 방법과 문항별 쟁점 등등 상세하고 전문적인 내용은 물론 각 산별연맹(노조)을 비롯한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알고 있다. 당연히 노-사-공익위원의 상대 조직과 개별 위원의 특징을 파악하고 고도의 정치과정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조직이 취약한 위원이 근로자대표로 참여하면 어떻게 온전히 노동의 이해가 반영될 수 있을까? 사측은 물론 정부위원과 공익위원의 논의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울 뿐이니 동등한 교섭이 될 리 없다.
정책이 노동결사체 기반을 상실할수록 사회는 더 불평등해진다. 최저임금 인상에 문제가 생기면 당장 피해를 입는 노동자는 최저임금 기준에서 소득이 결정되는 저소득노동자다. 연금 재정운영에 가입자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문제가 생겨 혜택이 줄어들수록 불이익을 입는 이들은 노후 준비가 어려운 취약계층이고 미조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노동조합(특히 총연맹)은 담장 밖 노동자도 포괄하는 노동운동을 하고자 할수록 일단 위원회의 정치과정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정부와 맞서야 할 것이다.
둘째, 노동계를 포함해 다양한 시민사회단체가 자생적으로 나타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과 육성이 중요하다. 노동계와 다른 결사체 조직이 함께 발전하지 않으면 사회 핵심 이해당사자인 노동자 대표를 비롯한 시민사회 대표가 배제되거나 노동자 대표만 홀로 고군분투하는 ‘노동’ 없는 거버넌스 운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문재인정부 시기에는 ‘시민사회 활성화를 위해 시민사회 및 공익활동 역량 강화-성장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시민사회기본법’제정이 추진되기도 했다(박현미, 2021:285-287).
‘시민사회 활성화와 공익활동 증진에 관한 규정’도 대통령령으로 지정되었는데 이번 정부 들어 폐지되었고 국고 보조금이 축소되거나 사용 규정이 까다로워졌다. 급격하게 늘어난 위탁조직도 그에 맞는 제도를 운영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맞은 경우도 있다.11) 이제 노동조합은 시민사회단체 등의 역량 강화를 적극 지원하도록 정부나 지자체에 요구하는 등 시민사회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셋째, 정부 위원회제도 자체에 대한 재점검도 필요하다. 민주화 이후 정부위원회가 시민들에게 개방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입법부나 행정부가 모든 시민의 삶의 문제를 결정할 수는 없으며, 이해관계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운영에 부합해서다. 단순히 정부 정책을 보조하거나 민간이 행정책임을 떠맡고자 시작된 제도가 아니다.
그런데 현재 600개가 넘는 정부위원회가 다양한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실질적 당사자들이 참여해 운영되고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위원회 전반을 검토하고 시민조직의 참여 수준과 정책과정에서 역할 정도를 따져야한다. 특히 지금처럼 정부가 마음대로 위원 추천 규정을 바꿀 수 없도록 법 개정도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각종 정부위원회 운영에 있어 운영규칙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으며 과도한 공익위원 참여에 대해 재고할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원장과 회의체가 변동되지 않고 안정적인 논의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일하는 시민의 이해가 보다 통치권력에 체계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정부위원회 참여를 넘어서 행정부를 감시할 수 있는 국회와 정치 역할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가령 현재 보험정책의 결정 권한은 대부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집중되어 있고 의결 절차도 사실상 위원회 한곳에 집중되어 있다. 건강보험의 중요정책을 행정부 한 위원회에 모두 집중하여 결정하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 찾기 어렵다.
위원회의 권한과 검토사항에 대해 의회가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통제권을 강화하거나, 상임위가 기금운영 계획을 보고받는 등 각국 제도를 참고해 여러 장치를 입법할 필요가 있다(김준현, 2014;2017). 또한 이러한 국회의 행정부 감시와 유의미한 입법이 가능하려면 친노동세력이 더 많이 국회에 입성하도록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다섯째, 장기적으로 노동조합이 정부위원회에서 보다 내실 있게 참여하고, 일하는 시민의 모든 생활세계에 관여할 수 있으려면 사무국의 정책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인력확충과 예산 확보도 필요하다. 모든 위원회에 노동조합이 직접 참여할 수 없고 전문가 추천도 필요하지만, 지금 노총 중앙의 정책과 연구 인력만으로는 누가 괜찮은 전문가인지도 찾기도 쉽지 않다.
또한 아무리 조직이 전문가와 네트워크가 긴밀해도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기에 개인의 판단과 발언은 자율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소임을 다하지 못해도 책임을 묻기 어렵다. 노동조합 스스로 조직에서 사용자와 행정부에 대응할 수 있는 연구조사인력을 키우고 자원을 축적할 필요도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갈등하는 이해당사자들 사이 다원적 결사체들이 사회적 힘의 균형(social equilibrium)을 형성할 수 있을 때 발전한다.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고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정치가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책 수요자인 이해당사자들의 요구를 조직할 권리, 정책 과정에 좀 더 온전한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은 찾지 않고 정치가가 조정 없는 내용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행위는 정책 공급자가 갖는 선의만 앞세우는 온정주의(paternalism)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온정주의는 권위주의의 다른 얼굴일 때가 많다(박상훈, 2015:215-216). 양극화를 비판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를 말하면서도 정작 노동하는 시민들이 모여 있는 대표 결사체를 ‘기득권’으로 무시하는 이들은 어떤 ‘지향’을 가진 사람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자’는 아니다. 이 점에서 노동조합은 세간의 공격이나 대표성 논란에 위축되지 않고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는 것이 곧 한국 민주주의를 더 낫게 만드는 길이라 믿고 자기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