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길이 없다. 회의에 열중하다가 요란한 소리에 눈을 돌려 창밖을 봤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시야가 사라졌다. 동남아 나라들에서나 볼 것 같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덜컥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남극의 거대한 빙하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무너지고, 그린란드와 히말라야산맥에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며, 곧 멕시코 만류가 중단되어 유럽이 얼어붙을 것이고, 산불이 하와이 섬을 일부를 태워 버렸다는 뉴스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폭우는 물러가고 길 건너편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기후재난과 인간사회
정말 안심해도 되는 것일까? 두려움이 불쑥 불쑥 밀려오는 일이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다.오송 지하차도에서 겨우 벗어난 차량의 카메라에 담긴 아슬아슬한 영상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타고 있는 버스가 지하차도로 내려가는 순간 짧게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온실가스 배출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지 뙤약볕 아래를 걷다, 폭염에 카트를 밀다 사망한 청년 노동자가 생각나 울컥한다. 40도 가까운 작업환경에서 휴식 시간도 없이 일하는 쿠팡 노동자들도 생각난다. 우리는 기후재난 속에서 안전하고 존엄하게 살고 일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엄청나게 배출한 기업과 부자들은 멀쩡한데, 기후위기에 별 책임이 없는 이들만 억울하게도 대가를 대신 치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민다. 우울감을 떨치기 힘들다.
기후정의행진에 노동자가 참여하는 이유
3만 명 이상이 모였던 작년에 이어, 올해도 대규모 ‘기후정의행진’이 조직되고 있다. 이 행진에 이름 붙여진 ‘기후정의’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할까? 어쩌면 나처럼 기후위기가 무섭고 또 기후 불평등에 화가 난 사람들이 모였을지도 모른다. 이 행진에는 환경단체 회원뿐 아니라 인권, 평화, 여성, 반빈곤,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부정의와 불평등에 맞서 싸워 온 사회운동가들과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3만 명 중 5천 명 정도는 노조 깃발 아래에 행진한 노동자들이었다. “불타는 지구 위에 일자리도 없다!”는 슬로건이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과감한 탈탄소 사회로의 전환이 정의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노동자가 참여했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주요한 방안 중의 하나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뒤집으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화석연료 이용을 줄이고 최종적으로는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탈탄소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사회 전체의 거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 위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당장 폐쇄되고 있는 석탄발전소나 산업전환이 예고된 내연기관차 노동자들에게 코앞에 닥친 일이다. 노동자들에게는 달갑지 않다.
탈탄소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그러나 이미 경험하기 시작한 기후재난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더 큰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탈탄소 전환의 필요성도 거부할 수 없다. 노동자를 포함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부정과 거부가 아니라 정의로운 전환이다. 생존과 삶을 위해서 탈탄소 전환을 망설임 없이 추진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폐쇄를 앞둔 석탄발전소 노동자들이 공공 중심의 재생에너지 사업에서 일자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에 함께 하는 이유다. 오히려 이 기후위기를 유발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물어봐야 한다. 경제성장을 위해 사람과 자연을 착취해온 선진국, 거대 기업, 그리고 부유층이 이 위기의 핵심적인 가해자들이다. 이들이 거대한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며 심화시키고 있는 불평등이 모두가 직면한 기후위기의 원인이다.
한국 전체 배출량의 11-13%를 차지하고 있는 포스코를 생각해보자. 엄청난 석탄을 태워 철강을 만들고 있는 포스코 작업장은 노동자들이 다치고 죽는 산업 재해를 가장 많이 발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또한, 총칼로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는 미얀마 군부에게 합작회사를 통해서 거대한 자금을 흘러 들어가도록 방치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포스코에 대해 공동 저항하는 행동에 기후 정의를 실현하는 투쟁이 결합하고 있다. 거대 자본의 폭력적 지배 행위에 맞서, 정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민중의 연대와 단결이 필요하다. 기후-인권-노동의 공동 저항은 기후 운동이 단지 환경만을 보호하겠다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후정의운동은 이제 시작된 기후재난 앞에서 우리가 존엄하게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기후위기의 전조라고 평하던 코로나 재난 때 최상위 부유층들이 자신들만 살겠다고 외딴 섬으로 피난을 떠났던 소식, 봉쇄 조치로 가게를 닫고 일자리를 잃어 많은 이들이 경제적 타격을 받았던 시기에 최상위 부유층의 부만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무너져 가는 세상에서 각자도생의 유혹은 기후위기의 책임자들에게 빠져나갈 구멍만 만들어줄 것이다. ‘923 기후정의행진’은 기후위기 앞에 내몰린 99%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두려움, 무기력, 외면과 방관을 떨쳐내고, 함께 생존하고 존엄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으며 대기업과 부유층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행동이다.
노동자가 함께 ‘923 기후정의행진’으로
‘923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는 행진을 준비하면서 5대 대정부 요구를 채택했다. 5대 대정부 요구는 ▲기후재난으로 죽지 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 ▲핵발전과 화석연료로부터 공공 재생에너지로,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정의로운 전환 실현하라 ▲철도 민영화를 중단하고 공공교통 확충하여, 모두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생태계를 파괴하고 기후위기 가속화 하는 신공항건설과 국립공원 개발사업 중단하라 ▲대기업과 부유층 등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고,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등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불평등이 재난이다. 모두의 에너지 기본권과 주거권을 보장하라 ▲탈석탄법 제정하고 삼척석탄발전소 건설을 즉각 중단하며, 탈화석연료 계획을 강화하라 ▲이윤을 위해 비인간 동물을 상품화하는 공장식 축산을 정의롭게 전환하라 ▲자본의 농업생산 진출을 막고, 생태농업전환을 지원하며, 농민생존권 보장과 식량 주권을 실현하라 ▲차별 철폐, 공공 돌봄 증진, 공공의료 확충, 노동시간 단축으로 기후위기 속에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라 ▲군비축소를 통해 평화를 증진하고, 기후 재원을 마련하라 ▲기후정의에 입각한 온실가스 감축과 국제적 생태부채 해결을 위한 책임을 다하라 등의 14개 세부 요구도 제시했다.
‘923 기후정의행진’은 단순히 온실가스를 감축해서 지구 온난화를 막자는 목소리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지금껏 우리 사회를 해체하고 사람들을 곤궁에 몰아넣었던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체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담고 있다. 기후위기 해결 또한, 불평등 체제를 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923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다. 9월 23일, 서울 세종로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