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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자리를 채우는 건축

<콜럼버스>(2018)

등록일 2024년05월08일 09시2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채희숙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미국 인디애나주의 도시 콜럼버스는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박물관과도 같은 곳이라고 한다. J. 어윈 밀러라는 지역 사업가가 설립한 재단에서 자신들이 선택한 건축가에게 공공건물 설계비 전액을 지원하는 건축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기에, 약 4만 명이 거주하는 소도시임에도 콜럼버스에는 수십 개의 모더니즘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 영화 <콜럼버스>(코고나다, 2018)에서 제목이 오르자마자 바로 소개되는 건물은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이 디자인한 ‘최초의 기독교(First Christian)’라는 이름의 교회로, 그 건물의 전면을 차지하는 십자가와 문은 정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살짝 치우쳐있다. 케이시는 그것을 바라보며 “사리넨의 디자인은 비대칭 속에 균형이 있죠”라고 읊조린다.

 

영화 <콜럼버스>에서의 교회

 

이 지역 주민인 케이시는 한때 마약에 빠진 어머니를 홀로 지켜야 했던 청소년기에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들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지금도 그녀는 엄마를 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해서 건축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포기하고 공공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한편, 콜럼버스에 방문 일정이 있던 저명한 건축 비평가가 질환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자, 그를 돌보기 위해 아들 진이 이곳에 임시로 거주하게 된다. 진은 일평생 가족을 보살피기보다도 건축에 더욱 매달린 아버지를 곁을 지키는 일이 낯설고 마뜩찮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듯 비슷한 상황에 있다. 케이시와 진 모두 부모를 돌봐야 하기에 콜럼버스를 떠나지 못한다. 케이시는 어머니 곁에 남고 싶더라도 떠나는 것이 좋고, 진은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더라도 남는 것이 필요하다.

 

케이시와 진의 상황은 가족관계에서 발생했지만, 그들은 이를 놓고 가족들과 싸우지 않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그들이 부모의 삶의 비밀을 궁금해하고 부모 부양의 문제를 고심해도 부모들은 답을 주지 않는다.

 

이들 가족의 마음은 대칭을 이루어 마주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극적인 사건으로 그 상황과 고민이 해결되거나 사랑을 통해 극복되는 일은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부모들은 끝까지 그들의 자식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가족이란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주지만, 또한 마지막까지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없는 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할 터이다.

 

케이시와 진은 아무 말 없는 건축물 앞에 서서 그것들과 그 앞에 선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던 끝에 떠나거나(케이시) 남는다(진).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관계에서도 해소하지 못하고 각자가 지고 살아가는 그들 각자의 고독을 영화는 없애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인정한다.

 

케이시는 위압적인 요새 같았던 기존 은행 건물들의 이미지를 바꾸는 시도로 지어진 통유리 창으로 된 은행 건물에 대해 진에게 이야기한다. 이때 유리는 권위 대신 투명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물이 되지만, 이 영화에서 유리는 좀 더 복잡하다. 케이시가 그 건물이 자신에게 주는 감동을 설명할 때 카메라는 건물 안쪽에 서서 유리창 너머 바깥의 케이시와 진을 보고 있고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유리는 투명한 소통의 매개체가 아니라 마주 보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는 벽이 된다. 엄마가 청소하는 건물의 유리창은 바깥에서 그들의 실루엣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케이시는 그 유리창 너머로 엄마를 보되 알 수는 없다.

 

정확히는 엄마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엄마가 케이시의 전화를 별일 없이 받거나 받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을 케이시가 목격할 수 있다고 해도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엄마의 흐릿한 윤곽뿐이다. 케이시는 엄마의 비밀에 닿을 수 없다. 이처럼 이 영화는 가족이 아무리 서로 아끼고 사랑해도 서로 합일에 이르는 관계가 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진은 아버지가 비평을 준비하던 건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만, 아버지의 수첩에 남겨진 메모만으로는 그 건축물을 알 수가 없다. 그는 케이시와 함께 앉은 곳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사유의 대상일 건축물의 추적을 멈추고 그곳이 아버지의 시선이 머문 곳이라고 결정하기로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진은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에 서 있던 첫 장면과 꼭 같은 장면 속에 서 있다. 진이 추적을 멈췄던 건물은 완전히 이어져 있지 않고 중앙이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벽돌 층을 가지고 있다. 그 중앙의 허공이 있기에 그 벽돌 층은 서로 마주 대하는 양쪽이 된다.

 

마치 우리도 그처럼 텅 비어 만나지 못하는 각자의 고독의 자리가 있기에 또한 너와 나로서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아버지가 보고 있던 것은 각자의 고독한 자리와 함께 공존하는 마주침의 공간이었을까. 그리고 진은 아버지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균형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도서관 동료가 어떤 책의 낙서를 보고 케이시에 진지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낙서는 책을 읽기보다는 게임에 몰두하는 세대를 향해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진단하는 문제의식에 반박한다. 책 대신 게임을 하는 것은 주목(attention)하는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흥미(interest)가 달라졌기 때문이며,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콜럼버스>는 너무나 가까이 있고 익숙해서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지닌 흥미를 발견하는 영화고 그 구체적인 대상은 건축이다. 집이 있어 안과 밖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건물이란 너무나 자연스러운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몸과 마음이 흘러가는 방식과 삶의 형태를 만드는 건축과 함께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 고독의 자리는 진공이 아니라 건축물, 더 정확히는 영혼이 담긴 모더니즘의 사유로서의 건축이 빚어낸 공간이 채우고 있다.

 

이 영화에서 건축이란 익숙함 속에 숨어있는 원리를 찾아내는 것, 다시 말해 생활에 스며들어 그 속에서 흥미로움을 발견하고 중요한 것을 찾아내는 힘처럼 보인다. <콜럼버스>는 건축을 통해 우리의 안과 밖, 관계의 거리와 마주침, 고독의 자리가 만들어내는 삶을 사유하고, 이를 통해 고요하게 또 무심하게 고독과 마주침의 공간을 오가는 우리를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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