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약
탄소중립계획의 일환으로 석탄화력발전소의 단계적인 폐쇄가 진행됨에 따라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거버넌스의 구축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고용문제의 해결은 물론 전력·에너지 산업의 구조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노동을 비롯한 이해당사자의 참여가 절실한 탓이다. 전환 거버넌스는 사회적 대화와 업종차원의 단체교섭, 그리고 기업차원의 공동결정 등으로 이뤄진다고 보지만 이 글에서는 사회적 대화에 초점을 맞춘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에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탄소중립정책의 수립은 물론 이행계획의 확정과 이행점검, 관련 법·제도의 개선 등을 다루는 민관합동 거버넌스기구다. 하지만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기구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한편 위원회의 대표성과 독립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산업·업종별 사회적 대화기구의 설치를 명문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한편 윤석열 정부에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개편과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기후위기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민감도가 낮은 탓이다. 노동정책이나 공공기관 정책에서도 사회적 대화는 정책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다. ‘버려진 의제’인 듯이 보인다. 그간 윤석열 정부가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에 따른 고용문제나 노동참여적인 거버넌스 구축을 언급한 적은 없다. 권위주의(‘법과 원칙’)와 시장주의(‘노동의 배제’)에 바탕을 둔 노동정책이 부활하면서 취약한 사회적 대화의 기반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효율화와 재무 건전성을 내세우는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정책도 사회적 대화에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기후위기 대응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를 넘어서는 전망, 즉 노동의 투쟁을 비롯한 대중의 직접행동을 조직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대중의 직접행동에 의존한다는 것이 사회적 대화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직접행동이 지향하는 바의 하나는 제대로 된 기후전환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노동참여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 노조만의 힘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면 노조의 정체성을 사회적 조합주의(social unionism)에 두고 사회적인 연대를 구축할 필요도 있다. 노조 사이의 연대는 물론 노조와 지역사회 사이의 연대, 나아가 노동과 환경 사이의 연대(‘적녹동맹’) 등이 대표적이다.
|
|
이 글은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2022년 정책연구과제로 진행 중인 『정의로운 에너지전환과 노동조합의 대응전략-석탄화력발전소 폐쇄를 중심으로』(박태주·이정희, 2022)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
|
Ⅰ. 들어가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가 발등의 불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60기의 석탄화력발전소 중 10기를 이미 폐쇄하였으며 앞으로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가 고용에 미친 영향은 지금까지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석탄발전소의 폐쇄가 가속화되면서 고용에 미치는 충격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 배치전환의 공간이 축소되는 데다 재생에너지 부문(유지 및 보수)의 고용전망이 밝지 않은 탓이다. 재생에너지로 건너가는 교량 역할을 LNG가 담당한다지만 LNG도 화석연료라 단계적으로 축소되어야 할 발전원일 뿐 아니라 LNG 발전의 고용흡수력도 석탄발전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고용문제를 비롯해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분담하는 일은 정의로운 전환의 출발점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에 따른 대응방안으로서 노동(및 지역, 환경시민단체,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전환 거버넌스가 주목의 대상이 된다. 노동자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최일선의 당사자인 탓이다.
노동자가 참여하는 전환 거버넌스로는 사회적 대화와 업종차원의 단체교섭, 그리고 기업차원의 공동결정 등이 있지만(박태주·이정희, 2022 참조) 이 글에서는 사회적 대화에 초점을 맞춘다. 전환 거버넌스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빈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먼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가 적절한 수단인가를 살펴본다. 이어 한국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어디에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한지, 윤석열 정부에서 그게 가능할 것인지를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과정에서 노동참여적인 전환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를 살펴본다.
Ⅱ. 기후위기의 대응수단으로 사회적 대화는 적합한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의 역할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가령 자신이 사회적 대화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는 정의로운 전환의 디딤돌로 사회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목표와 이행경로에 대한 강한 사회적 합의는 기본이다. 사회적 대화는 모든 단계에서 정책결정과 이행을 위한 제도적인 틀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 적절하고 정보가 주어진, 진행 중인 협의는 모든 관련된 이해당사자가 참가한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ILO, 2015).
국제노총(ITUC)이나 유엔환경계획(UNEP), 세계보건기구(WHO)도 하나같이 기후위기 대응과정에서 노동이 참여하는 삼자주의(tripartism)를 강조한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조를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사회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불신하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탈성장,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이 요구되는 데 “사회적 대화가 체제전환을 달성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사회적 대화는 본질적으로 이해당사자 사이의 타협을 바탕으로 의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Sweeney and Treat, 2018).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이는 후술한다).
사회적 대화를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는 “정의로운 전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정의로운 전환을 생태 사회주의(eco-socialism)를 실현하는 길로 이해하거나 탈성장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으로 해석할 경우 사회적 대화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로운 전환이 ‘공유된 해결책’을 바탕으로 구조개혁을 지향할 경우 사회적 대화는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 후자는 유럽연합(EU)의 각국은 물론 우리나라 정부의 뉴딜정책이나 탄소중립기본법이 채택하고 있는 기조이기도 하다.
Ⅲ.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가능할까
기후위기 대응, 구체적으로는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와 관련하여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는 어디에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윤석열 정부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등이다.
이 글은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에 대응하는 전환의 거버넌스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를 지목한다. 실제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탄소중립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국가 비전과 정책은 물론 이행계획을 수립하고 이행점검과 법·제도의 개선 등에 관한 사항을 다루는 민관합동 거버넌스 기구다(윤순진, 2021). 구체적으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우선 범사회적·시민적 대화에 적합하다는 장점을 갖는다. 즉 노사중심성의 원칙이 관철되기보다는 노사정과 함께 지방정부, 환경단체 및 전문가의 의견이 폭넓게 반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은 노동 의제를 넘어 사회적인 의제에 속한다.
둘째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일정한 기한 내에 심의·의결할 수 있는 의사결정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합의 또는 의결사항에 대한 이행능력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사회적 대화는 ‘협의’ 과정이며 기후위기 대응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사결정을 지연시킬 수 있는 의제가 아니다. 또한 사회적 대화에서 합의·의결사항의 미이행이 커다란 함정이었다면 정부가 참가해 결정한 사항을 정부가 이행하는 것은 핵심적인 전제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국가 차원의 탄소중립 비전과 지역 차원의 탄소중립정책 사이에서 피드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위원회의 위상이 각 부처의 정책을 조율할 수 있다는 점도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갖는 장점이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로 역할을 하려면 몇 가지 사항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은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윤순진 위원장도 밝히듯이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에 직접 나선 것은 아니다.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만 하더라도 문재인 정부가 ‘공정한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거듭 강조했지만 어디서 대화를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한 채 정권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기후위기 관련 의사결정과정에서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동등하고 실질적인 참여”(탄소중립기본법 제2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정체성을 사회적 대화기구로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의 성격을 갖는다면 구성 및 운영도 사회적 대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먼저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대표성을 높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기업관계자나 기술·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이해당사자 중심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과 환경단체, 종교단체, 청년단체 등의 불참에 따른 대표성 부족 문제를 해소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특히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를 배제하면서 대표성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위원회의 독립성도 관건이다. 정부에 대해 독립적으로 탄소중립계획을 제출하고 이행을 감시할 수 있도록 위원회를 독립위원회로 구성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국가인권위원회나 전문가단체이긴 하나 영국의 기후변화위원회(CCC)를 참고할 수 있다).
정부 예산과 인사에 의존하고 사무처까지도 공무원으로 구성되는 단체가 독립적인 사회적 대화기구로 기능하기는 어렵다. 또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내에 분과위원회나 특별위원회와 별개로 산업·업종차원에서 기후위기 대응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도록 명문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지역차원은 지역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면 윤석열 정부에서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재정립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대화는 가능할까.
Ⅳ. 윤석열 정부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가 어렵다면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어렵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이들은 한국에서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제도적인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위계적인 정상조직과 포괄적․독점적인 이익대표체계, 그리고 강력한 사민주의 정당의 존재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코포라티즘을 지배해 온 고전적인 논리였다.
이런 주장은 상대적으로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고 분권화된 조직구조를 가진 나라에서 사회협약을 체결하는 사례가 나오면서 흔들린다(Baccaro, 2003; 권형기, 2014).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비롯한 남유럽국가와 아일랜드가 대표적이다. 사회적 주체들의 전략적 선택이 사회적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대화를 위한 제도적인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주체들의 의지와 역량에 따라 사회협약의 체결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럼 한국에서도 기후위기와 관련한 이해당사자들의 의지와 역량으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할까.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려면 탄소중립의 실현은 물론 사회적 대화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수적이다. 폐쇄되는 발전소들이 공기업일 뿐 아니라 폐쇄과정에서는 에너지 정책이나 산업정책은 물론 노동정책과 사회안전망 정책 등이 폭넓게 다뤄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민감도는 낮다. 윤석열 정부의 탄소중립정책은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준수하는 가운데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조정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게 고작이다. 국정과제에서 86번째로 밀린 “과학적인 탄소중립 이행방안 마련으로 녹색경제 전환”이라는 과제에서도 “2030 NDC를 준수한다”는 말은 있어도 시민이나 노동조합의 참여라는 말은 없다(취임 100일이 지나도록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구성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기조는 최근 정부가 발표한 「새정부 에너지 정책 방향」(2022.7.5.)에서도 이어진다. “석탄발전은 수급상황·계통을 신중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감축을 유도”한다면서도 사회적 대화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가 초래할 수 있는 고용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언급도 없다.
노동배제의 노동정책과 공공기관 혁신을 내세운 공공기관정책도 사회적 대화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노동정책에서는 집단적인 노동권의 강화보다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노동시간의 유연화와 규제 완화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을뿐더러 권위주의(‘법과 원칙’)와 시장주의(‘노동의 배제’)에 바탕을 둔 노동정책은 취약한 사회적 대화의 기반을 더욱 약화시킬 것이다. 효율화와 재무 건전성을 축으로 삼는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정책의 부활도 사회적 대화에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윤석열 정부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가 성사될 가능성은 낮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이를 재구성하고(대표성의 제고) 운영방식을 바꾸는 것(독립성의 제고)이 현안의 과제이지만 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할 것이지만 그것이 구성되더라도 사회적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전환의 거버넌스로 사회적 대화를 실현하려면 사회적 대화를 넘어서는 전망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노동의 투쟁을 비롯한 대중의 직접행동이다. 청소년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을 강조하는 주장은 많다(조너선 닐, 2019; 나오미 클라인, 2016).
대중의 직접행동에 의존한다는 것이 사회적 대화에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직접행동이 지향하는 바의 하나는 제대로 된 기후전환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실제로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오는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을 준비하고 있는 환경단체들의 요구이기도 하다. 대화와 투쟁은 이원적으로 병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을 이루면서 하나로 통합된다. 대화가 투쟁을 배제하지 않으며 투쟁은 대화를 지원한다.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연속이다”란 건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의 말이다. 대화는 그 자체가 투쟁이고 투쟁은 대화의 연속이다(김만수, 2020).
노조참여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 노조의 힘만으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노조가 기업의 담벼락을 넘어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연대전략이란 노조가 다른 조직으로부터 자원과 영향력을 빌려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대형성전략은 노조의 지향에 대해 폭넓은 합법성을 부여하고 노조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킨다. 이를 통해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에 직면한 노조로서는 고용보장과 함께 탄소중립을 개별 사업장이 아닌 사회적 의제로 추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연대는 노동계 내부의 파편화된 조직체계를 극복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기업별 노조 사이, 발전공기업(원청)노조와 자회사·협력회사 노조 사이, 상급단체(한국노총-민주노총, 한국노총 공공노련-연합노련)를 달리하는 노조 사이에 공동대응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이러한 연대체는 사회적 대화와 함께 업종차원의 단체교섭을 실현하는 토대가 된다. 현재 활동 중인 「전력산업정책연대」나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위원회」를 확대·강화하려는 노력이나 발전공기업 5사 노조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의미를 갖는 이유다.
노동조합과 지역 사이의 연대는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에 따른 최일선의 당사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연대에 해당한다. 나아가 정의로운 전환은 고용과 환경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이들 사이의 연대(‘적녹동맹’)를 내포한다. 노동조합과 환경단체의 만남이 그것이다. 사회적 연대는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을 통해 기후전환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거버넌스의 효율적인 작동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된다.
노동자의 참여가 실질적인 참여로 이어지려면 노조의 내부역량 강화도 중요하다. 핵심은 두 가지, 조합원의 기후의식을 높이는 일과 함께 정책역량을 강화하는 일이다. 조합원의 기후의식을 높이는 과정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지만 실천적인 행동을 조직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생활 속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노력(텀블러 사용, 냉난방 온도 조절, 친환경 먹거리, 대중교통수단의 이용 등)과 사업장에서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노력(건물의 리모델링, 친환경 차량 교체, 재생에너지 발전 등), 그리고 이를 위한 기후환경단체와의 교류 및 공동노력 등이 포함된다.
체제전환과 같은 원칙적이고 본질적인 대응도 중요하지만 덜 이상적이더라도 조합원과 함께 하는 실천을 추진하는 것이 너무 잘하려다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석탄발전소 폐쇄를 둘러싼 노조의 대응에서 조합원의 참여와 동원이 불가피하다면 그 출발은 교육과 실천을 통해 조합원의 기후의식을 높이는 일이다. 한편 정책역량을 강화하려면 발전관련 노조의 연대체 차원에서 정책연구단을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나가며
대전환의 시대, 복합적인 전환을 이끄는 것은 기후위기 대응이다. 그것은 디지털 전환이나 팬데믹과 결합하여, 마치 태풍이 합쳐져 위력을 더하듯이, 우리 사회에 기후위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기후재난은 노동자도 예외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일상이고 생존문제로 다가온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전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재난’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고용보장(및 원활한 일자리 전환)은 물론 산업조직과 경쟁구조, 생산방식, 작업조직과 작업환경, 노사관계 등 ‘일의 세계’를 통째로 바꿔놓을 것이다. 석탄화력발전부문은 기후위기 대응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에 대한 노조의 대응전략은 기후위기에 대한 노조의 전략모델을 형성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에너지 부문의 전환이 앞으로도 30년 가까이 진행될 과제라면 이번 전략은 장기적인 대응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노조로서도 적극적인 전환전략이 요구되는 이유다.
기후위기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재난이 불평등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불평등은 재생산된다.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일이 되풀이된다는 점에서 계급적이기도 하다. 그 불평등과 계급성을 끊어내는 것이 정의로운 전환이며 그것은 당사자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윤석열 정부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대화가 어렵다면 사회적 대화를 뛰어넘는 전망과 실천이 필요하다. ‘배제된’ 대중과 함께 하는,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이 그것이다. 투쟁은 사회적 대화를 비롯한 노동참여적 거버넌스의 구축은 물론 정책결정과 이행단계에 노동자의 힘을 실어주는 전달장치다. 바로 여기서 대화와 투쟁은 하나로 통합된다.
<참고문헌>
권형기(2014), 『세계화 시대의 역행? 자유주의에서 사회협약의 정치로: 아일랜드 사회협약 모델의 수립과 진화』, 후마니타스.
김만수(2020), 『클라우제비츠와의 마주침』, 갈무리.
윤순진(2021), “2050 탄소중립위원회, 민관 함께 탄소중립시대 첫걸음 떼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6.4).
박태주·이정희(2022 발간예정), 『정의로운 에너지전환과 노동조합의 대응전략: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를 중심으로』,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조너선 닐(김종환 역)(2019), 『기후위기와 자본주의』, 책갈피.
나오미 클라인(이순희 역)(2016),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 열린책들.
Baccaro, L.(2003), What is alive and what is dead in the theory of corporatism, British Journal of Industrial Relations, 41:4.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2015), Guidelines for a just transition towards environmentally sustainable economies and societies for all.
Sweeney, S. and Treat, J.(2018), Trade Union and Just Transition. The Search for a Transformative Politics, TUED Paper No.11,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