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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의 노사정 관계와 정의로운 전환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등록일 2022년10월06일 13시2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2020년 5월, 줄리 바틸라나 교수(하버드대) 등 세 명의 학자가 주도하여 성명서 ‘노동: 민주화, 탈상품화, 생태 복원’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불과 2주 만에 전 대륙 700개 이상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5,000명이 넘는 연구자들의 지지 서명을 받았고, 2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판은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하는 『국제노동브리프』 2020년 8월호에서 볼 수 있다.)

 


 

 

위험의 불평등과 기업 민주화

 

이 성명서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더 분명하게 드러났고, 더 심화한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과 기후위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우리의 일과 조직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핵심은 노동자 참정권 부여를 통한 기업의 민주화, 일자리 보장제 도입 등을 통한 노동의 탈상품화다. 이 성명서에서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언도 담고 있는데,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기업을 구하고자 할 때 2008년 경제위기 때처럼 무조건적인 긴급 구제를 감행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일정한 행동 변화’를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 전제조건에는 엄격한 환경 기준 준수에 더해 기업이 민주적 내부 운영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를 위해 성명서는 사업장평의회(Works Councils)라는 노동자 대표기구를 통한 독일식 공동결정제도를 넘어선 노동자(대표)의 기업지배구조 참여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선임, 주요 전략 수립 및 이익 배분 등과 같은 주요 의사결정을 할 때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대표기구로부터도 승인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할 때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주주들과 같은 비중을 가질 수 있도록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생태 복원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법, 말하게 하는 방법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이 제안과 거리가 있다. 석탄화력발전소 단계적 폐쇄가 이루어지고 있는 발전산업 전환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나 현장의 의견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은 정책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발언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9월 제정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약칭: 탄소중립기본법)에는 의사결정과정에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차별화된 책임 원칙이 담겨 있지만, 법은 침묵하고 있다.

 

o 이해관계자 참여 원칙

제2조(정의) 12. ‘기후정의’란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사회계층별 책임이 다름을 인정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며 기후변화의 책임에 따라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 부담과 녹색성장의 이익을 공정하게 나누어 사회적·경제적 및 세대 간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제3조(기본원칙) 7.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과 녹색성장의 추진 과정에서 모든 국민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한다.

 

o 차별화된 책임 원칙

제2조(정의) 13. ‘정의로운 전환’이란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지역이나 산업의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등을 보호하여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사회적으로 분담하고 취약계층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책방향을 말한다.

제3조(기본원칙) 4. 기후위기로 인한 책임과 이익이 사회 전체에 균형 있게 분배되도록 하는 기후정의를 추구함으로써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동시에 극복하고,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취약한 계층·부문·지역을 보호하는 등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한다.

 

참여는 단순히 이해관계자의 이해를 반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장의 전문성을 정책 결정 과정에 동원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를 통해 실현 가능한 정책수단을 설계할 수 있다. 기술관료와 학계 전문가가 결정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현장성이 가미된 정책 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노동조합의 참여는 노동조합이 탄소중립의 실현은 물론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로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침묵하는 법을 말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중층적 거버넌스 구축

 

이를 위해 노사관계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정책은 거버넌스를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적 대화 체제 구축이 핵심이다. 사회적 대화라고 하면 흔히 제도화된 어떤 위원회를 떠올리는데, 사회적 대화는 이러한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1) 노·사·정, 전문가와 시민사회까지 포괄하는 주체들이 2) 기업, 산업·업종(및 지역)과 전국 수준에서 3) 임금·노동조건·고용·직업훈련·산업안전보건·사회안전망 등 일의 세계를 둘러싼 다양한 의제에 관해 4) 단체교섭 및 노사 간 협의와 정보 교환 등을 하는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5년 발표한 ‘모든 사람을 위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를 향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지침’에서 7대 이행원칙 중 하나로 ‘전환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의 예측, 실직과 해고와 관련된 사회적 보호, 직업능력 개발,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포함하는 사회적 대화’를 촉구했다.

 

일의 세계를 둘러싼 환경 변화는 특정 기업 수준을 뛰어넘어 산업·업종 수준에서 지역사회를 포괄하는 논의 틀의 마련, 좁은 의미의 ‘근로자’만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모든 일하는 사람의 포섭, 단체교섭과 함께 다양한 층위에서의 참여와 협의를 요구한다. 따라서 노사관계 거버넌스는 단층적이기보다 중층적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양날개 전략’인데, 전국 수준에서 산업정책과 노동정책, 사회정책에 관한 협의를 진행하는 한편 산업·업종 수준에서 통합적인 산업·노동 전환 계획과 전환의 조건에 관한 단체교섭을 진행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기획을 바탕으로 기업 수준에서 노사협의회와 노동이사제, (보충적) 단체교섭 기제를 활용한다. 또한 지역 수준에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전환에 관한 세부 계획을 수립, 이행하자는 것이다.

 

발전산업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전국 수준의 사회적 대화는 탄소중립위원회에서 설정한 탄소중립비전을 이행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그 이행을 점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사회적 대화의 의제는 석탄화력발전소의 단계적인 폐쇄에 따른 전력수급의 안정성 확보와 이를 위한 전력(에너지) 산업정책이 핵심이 될 것이다. 고용정책과 사회정책은 전력산업정책의 기조와 연동해서 논의될 것이다. 고용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고용보장의 기본원칙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정책방안을 확인하는 일이다. 주요 방안에는 발전사 간 공동대응체제(인력교류나 직업훈련, 고용서비스 등)의 구축이나 초기업별 단체교섭 구조의 마련, (가칭)에너지전환기금의 설치와 사회안전망의 확충 등이 있다.

 

초기업 차원에서 이뤄지는 발전부문의 단체교섭에서는 발전 관련사의 공통적인 대응방안이 논의될 것이다. 특히 이 수준의 단체교섭에서 고용보장협약이 체결되고 발전사 차원의 통합적인 전환계획이 마련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발전공기업 이외에도 자회사와 협력사 노사가 참여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초기업별 단체교섭구조의 설치와 고용보장의 주요 정책은 앞서 사회적 대화에서 원칙을 확인해야 그 설치를 둘러싼 노사 간의 갈등과 마찰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중층적 거버넌스의 마지막 수준은 기업 차원의 공동결정이다. 이는 초기업별 수준에서 합의된 사항들에 대한 최종적인 확정 계획을 마련하는, 일종의 보충적인 논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공동결정의 체계에는 단체교섭이나 노사협의회, 그리고 (공공기관의 경우) 노동이사제와 같은 다양한 경영 참여의 통로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 민주화, 탈상품화, 생태 복원’ 성명서를 주도한 바틸라나 교수는 “‘변화의 정치학(Politics of change)’ 연구에서 발견한 주요한 사실은 단순히 ‘현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동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라며 “동요를 넘어서 혁신과 조직과정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기업 민주화와 노동의 탈상품화를 위한 노동조합 진영의 더욱 활발한 토론과 활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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