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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2021)

서부를 가로지르는 힘

등록일 2022년05월09일 13시49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서부극은 오랫동안 미국 영화의 터전이었다. 황량한 서부로 이주한 백인들이 땅을 일구고, 척박한 대지와 대결해 마을을 이루는 이야기는 미국 역사의 기원을 새기며 지속적으로 사랑받고 또 변주됐다. 아메리칸 원주민과의 목숨을 건 승부, 잔혹한 자연과의 싸움, 마침내 싹을 틔우는 문명의 장관은 이 장르의 관습적인 얼굴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위대한 서부극의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서부극은 쇠락한 장르가 아니라 끝없이 갱신을 거듭하는 장르로 살아남아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20세기 중후반에는 이른바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서부극의 인종주의적 함의를 반성하는 작품들 역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장르의 규칙과 전통, 이야기가 가진 힘을 깊게 숙고하지 않는 반성은 어딘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현대의 서부극 중엔 단지 주인공의 성별을 바꾸거나 짐짓 점잖은 태도로 반성의 언어를 읊는 것 이상으로 서부를 가로지르는 힘에 대해 탐구한 작품 역시 적지 않다. <피아노>(1993)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최초로 수상한 여성 감독인 제인 캠피온의 근작이자,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에 해당하는 은사자상을 수상한 <파워 오브 도그> 역시 그런 작품이다.

 

출처 : 다음영화
 

영화는 1925년 미국 북서부의 몬태나주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곳에 목장을 운영하는 두 형제 필(베네딕트 컴버배치)과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있다. 둘은 여러모로 다른데, 형인 필은 그야말로 서부의 거친 사내, 황야의 카우보이 같은 인물이다. 그는 우악스럽게 행동하며 일군의 카우보이 사내들을 이끌고, 맨손으로 소를 거세하는 남자다. 반면 동생인 조지는 목장의 경영을 도맡는 신사적인 사내다. 이들 사이에 식당을 운영하는 과부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가 스며든다. 필은 그들을 무시하지만, 조지는 로즈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그런데 둘의 결혼 이후에도 필의 횡포는 계속된다. 그는 피터를 계집애 같은 도련님이라고 조롱하고, 로즈를 숨 막히게 한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갔다가 방학을 맞아 목장에 돌아온 피터는 필의 영향력으로부터 엄마를 떼어내고 지키고 싶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필로 대표되는 서부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소년을 내세워 그에 대항하는 어떤 방법, 다른 어른이 되는 방법을 찾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이와 관련해 필이 모욕을 느끼는 순간을 주의 깊게 봐둘 필요가 있다. 목장에 형제의 부모와 주지사 부부가 방문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불안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부부가 말끔하게 정돈된 집에 들어서는 순간, 이 시공간의 주인은 더 이상 황야를 질주하는 카우보이가 아님을 상기하게 된다. 문명은 이미 곳곳에 들어섰고, 말과 함께 서부를 내달리는 사내는 설 자리가 없다. 그들의 방문에 앞서 조지는 필에게 당부한다. 주지사의 아내는 형이 씻지 않은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것은 필에게 모욕의 순간이다. 필은 문명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출처 : 다음영화
 

숱한 서부극에서 물론 서부 사나이는 언제나 마을에 정착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홀연히 나타나서 마을 공동체의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고 다시 거친 황야로 사라지는 그들은 문명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존재이나, 결코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외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영화적 헌사가 뒤따랐다. 운명을 짊어지고 떠나는 그들에게 영화는 거룩한 어둠을 허락했다. 하지만 필은 다르다. 그의 거친 면모는 동료 카우보이들 사이에서나 인정될 뿐, 양복을 차려입은 이들에게는 꺼림칙한 요소로만 여겨진다. 그런데 이 집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건 로즈도 마찬가지다. 한때 무성영화 상영관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그녀에게 조지가 피아노를 선물하고 손님들 앞에서 연주할 것을 부탁하는데, 로즈는 위축되어 덜덜 떨며 음 하나도 제대로 치지 못한다. 그녀는 이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미친 사람처럼 집안을 배회한다.

 

<파워 오브 도그>에 따르면, ‘서부 개척’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미국의 역사로부터 배척되는 건 단지 길들일 수 없는 자연과 아메리칸 원주민만이 아니다. 문제의 저녁 식사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로즈와 필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이다. 그 반대편에 조지가 있다. 그는 얌전하고, 신사답고, 로즈의 섬세함에 감동하는 감수성까지 지닌 남자다. 결코 위협적이지 않은 남성이지만, 바로 그러한 면모가 이곳의 질서를 보여준다. 이곳은 누군가는 미쳐버리고, 누군가는 혐오와 모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곳이다. 여기에 필이 입버릇처럼 치켜세우던 위대한 카우보이 브롱코 헨리, 이미 예전에 죽어 신화가 돼버린 그의 비밀이 겹쳐진다. 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피터가 우연히 필의 아지트에서 발견한 건, 브롱코 헨리가 필에게 단지 존경의 대상만은 아니었다는 증거다. 아주 직접적으로 명시되진 않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필은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비밀은 아주 깊고 어두운 곳에 묻혀야만 하는 것이었다.

 

출처 : 다음영화
 

필은 이중적으로 억압당한 존재다. 그의 성적 지향은 표면적으로도 돌출되지 못할 만큼 무겁게 억압돼있어, 여러 추론을 가능케 한다. 영화에는 그가 예일대에 다녔다는 언급도 잠시 스쳐 지나간다. 필이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자신을 숨겨야 했을지 상상해보게 되고, 또 그러한 과거가 어느 누구의 입으로도 반복될 수 없을 만큼 억눌려있었다는 것 또한 짐작해보게 된다. 한편 필의 폭력적 남성성은 은밀하게 억압된다. 그 대척점에는 예의 바르고 멀끔한 조지가 있는데, 그가 아내인 로즈가 목장에서 겪는 고통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것을 결코 대안적인 무언가로 보긴 어렵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결국 필을 처치하는 건 피터다. 그는 의대생답게 병균을 이용하며, 필의 과거를 통해 필에게 접근한다. 그야말로 한 시대의, 그리고 그 시대의 특정한 인간상의 종결이다. 통쾌하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고별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서부를 바라본 다른 두 편의 영화를 떠올려본다. 배우 토미 리 존스의 두 번째 연출작 <더 홈즈맨>(2014)와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2019)다. <더 홈즈맨>은 고향인 동부를 떠나 서부에 정착한 뒤 미쳐버린 여자들을 데리고 다시 동부로 향하는 여자 메리 비 커디(힐러리 스웽크)의 여정을 담는다. 커디는 성실하고 거룩하지만, 이 여정은 그렇지 않다. 개척과 정착의 역사에 흩뿌려진 수많은 죽음이 이 여정을 아득하게 휩쓸고 지나가면, 남는 것은 망각과 쓰라림뿐이다. 켈리 라이카트는 미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영화 작업을 지속하는 감독으로, 여성의 얼굴로 서부극을 다시 쓴 <믹의 지름길>(2010)을 만든 바 있다. <퍼스트 카우>는 자본가들이 자연에 울타리를 치기 시작한 시점에, 남들처럼 정착과 성공을 꿈꾸다 불균형한 싸움에서 밀려나 버린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엔 역사가 잃어버린 것, 어쩌면 필이 꿈꿨을지도 모르는 두 남성의 친밀한 유대가 담겨있다. 역사의 외부, 혹은 틈새에서 무수한 가능성을 발굴해내는 작가들은 앞으로도 서부의 새로운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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