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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제3회 난생처음 노동문화제 수상작] 수기 3등, 이지민

등록일 2022년02월28일 15시23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전공을 발판 삼아 경력을 발전시키고 나이가 들어서는 연봉 1억쯤 쉬이 받을 수 있으리라는, 지금 돌아보자면 망상에 가까운 미래 말이다. 그리고는 ‘비서는 한 명쯤 둬야지.’, ‘내 사무실은 꼭 통유리로 만들 거야.’, ‘회사 연말 파티로 호텔에 도착하면 누군가 문을 열어주겠지? 그러면 흠 없는 검정 구두를 완벽히 갖춰 신은 두 발을 우아하게 내리는 거야.’ 따위의 상상을 했더랬다. 세상은 보란 듯이 그런 나를 실컷 비웃으며 서류탈락이라는, 수많은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를 내게 안겼고 난 그 어느새 졸업한 후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취준생이라는 탈을 쓴 백수로 책상 앞에 앉아 거북목을 한 채 이력서와 자소서를 반복해 쓰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터널을 걷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에게 보기 좋게 차였었다. 지치고 질리게 만든다며 온갖 비수를 꽂고 간 그 덕분에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고 실패한 존재라는 생각에 종일 몸부림쳤다. 소셜미디어에 업로드된 행복함에 젖어 있는 지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해외 봉사활동을 함께했던 선배가 익숙한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걸 보았다. 푸른색 정장에 리본 비녀 그리고 비행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승무원이 된 것이었다. 그때, 왜인지는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그저 이 길이 나를 구원해주리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지만, 곧바로 선배에게 연락했다.

 

“언니, 승무원 어떻게 되셨어요?”

 

누군가의 한마디는 타인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고 했던가. 그 당시만 해도 승무원은 관광이나 서비스와 관련된 전공을 한 사람들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던 난,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 선배의 이야기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키도 작고 그다지 날씬하지도 않았기에 한국 항공사는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비교적 신장에 대한 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외국 항공사로 전략을 바꿨고 국내에 면접 일정이 없을 때는 유럽, 동남아, 중국까지 오직 ‘면접’을 보기 위해서 날아가기도 했다. 지원에는 이력서도, 자소서도 필요 없었다. ‘나’라는 사람과 영어 실력만 있으면 충분했다.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사실인지, 3개월 만에 싱가포르의 한 항공사에 최종 합격하는 기쁨을 맞았다. 입사 후 현지 공항에 도착한 그 날, 마중 나온 한국인 선배의 한마디에, 다소 도망가고 싶긴 했었다.

 

“Welcome to hell.”

 

승무원은 대부분, 특히 외국인 신분의 승무원은 외국 항공사에서 계약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내가 일했던 곳은 5년마다 계약갱신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승진을 한 단계씩 할수록 계약이 10년, 15년 갱신으로 늘어나는 구조였는데, 재밌는 것은 최고 사무장 중 외국인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외국인 승무원에게는 ‘출산 휴가’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아, 결혼까지는 할 수 있으나 임신하는 즉시 그만둬야 했다.

 

유니폼은 100% 맞춤으로 제작되었고, 어깨부터 발끝까지 몸을 빈틈없이 감싸는 옷을 입은 채 일해야 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살이 찌면 등이나 옆구리, 허리춤이 터지는 것은 예사였는데, 터진 유니폼으로는 절대 일을 할 수 없어 매번 여분의 유니폼을 챙겨 다녔다. 게다가 각자 키에 비례한 최대치의 몸무게를 회사에서 정해주었다. 그 이상으로 살이 찌면 공식적으로 비행이 금지되었다.

 

화장품은 특정 브랜드의 아이섀도, 립스틱과 볼 터치의 색상까지 회사에서 정해준 것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물품은 사비로 구매해야 했다. 긴 올림머리에서 단발머리로 바꾸려면 회사의 허가가 있어야 했으며 올림머리의 종류 또한 회사에서 정해주었다. 이러한 회사 분위기 덕분에 외모와 몸매를 지적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 트레이너와 상사들을 보며 나와 동기들은 생각했다.

 

“지금 21세기 맞는 거지?”

 

입사 후 첫 트레이닝 기간은 15주였다. 세계에서 가장 긴 훈련기간을, 회사는 자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제 비행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화장과 외모 등 보여지는 모습에만 집착하던 사무실과 훈련센터 사람들과는 달리 현장에서는 손 빠르게 그리고 소위 ‘똑똑하게’ 일하는 것을 더욱 중요히 여겼고 나를 훈련 대상이 아닌 한 동료이자 ‘사람’으로 대해주어 감사하기까지 했다. 나는 실제 현장에서, ‘노동하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첫 한 달이 갔고, 반년, 1년이 금방이었다. 항공업계의 호황으로 쉴 틈이 없었다. 일주일을 일하고 하루를 쉰 뒤 다음 날 바로 출근했고 회사는 항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치의 노동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정확히 24시간의 휴식 시간만 주는 경우도 많았고, 업무일정에 임박해 병가를 내면 남은 시간에 따라 포인트를 차감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인사고과에 중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잔병치레 하나 없는 건강한 몸을 타고났기에 한 번도 병가를 내지 않았으며 정해진 일정에 맞춰 출근했다. 다만 규칙적인 생활은 나와는 관계없는 저 멀리 어떤 유토피아 같은 곳의 일상이었고, 무려 30시간 넘게 깨어있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원하지 않을 때-예를 들어 오후 2시쯤, 오후 9시에 일어나기 위해-억지로 잠들어야 하고, 잠이 들었다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압박감 또한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해외 거주와 뒤죽박죽 스케줄 근무로 지인들의 경조사조차 챙기기 어려웠던 것은 덤이었다. 나는 항상 가족과 지인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미안해.”

근무한 지 만 4년이 되던 즈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첫 뉴스가 보도되고 두 달이 지났을까, 비행이 하나둘씩 취소되기 시작했고 끝내는 한 달 내 꽉 차 있던 모든 비행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톱니바퀴처럼 꽉 짜여 빈틈없이 돌아가던 일상이, 갑자기 멈춘 것이었다.

 

첫 한 달은 마치 휴가를 받은 듯 여유로운 일상을 즐겼으나 얼마 뒤 확진자가 폭증해, 정부는 봉쇄 지침을 내렸다. 슈퍼마켓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문을 닫았으며 이동 자체가 금지되어 가족 간의 방문조차 불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회사는 결국 6개월을 버틴 뒤 대규모 정리해고에 착수했다.

 

해고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근무 기간이 2년 반 이하인 사원들은 회사를 떠나야 했고, 한국인 승무원들은 150명 중 3분의 2인 100명이 정리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국민인 싱가포리안과 중국, 일본, 인도 승무원들은 정리해고 대상 국적이 아니었다. 회사는 국적마다 다른 등급의 비자를 발급했는데,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하는 국적의 직원들만이 정리되었고 한국인도 그에 포함된 것이었다.

 

국적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칠지언정 바꿀 수가 없었다. 뿔뿔이 흩어져 급히 직장을 찾는 동료들을 보며, 남은 사람들 또한 상황이 더욱 장기화한다면 그다음은 내가 떠나야 할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한국인인 나는 어쩌면 예상대로 회사와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들과 통화할 때면 나는 계속 질문을 했다.

 

“나 이제 뭐 하고 살지?”

 

노동 없이는 내 인생까지 끝나리라 생각했던 듯하다. 내 존재의 가치, 내 삶의 의미와 목표, 돈, 나이 그리고 가족까지. 대학 졸업 후 승무원이 되기 전까지 겪은 수많은 탈락에 트라우마라도 있었던지, 나는 이제 평범한 직장인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이유 없이 자괴했다.

 

모국의 품으로 돌아온 자가격리 기간 먹고 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어느 순간 나는 구인·구직 웹사이트에 접속해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적절히 다듬어진 뒤에는 셀 수 없이 지원하여 자가격리 이후에는 면접을 계속 보러 다녔고 최종적으로는 세 곳의 회사에 합격, 그중 한 회사에서 지금까지 근무 중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분명히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나를 투영시키고 가치를 재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간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생활은 녹록지 않았고, 아쉬우면서 마음 아팠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얻은 배움으로 나는 오늘도 묵묵히 살아간다.

 

어머니께서 내게 해주셨던, 큰 위로가 된 말씀이 있었다. “여름에 밭을 매러 가면 밭고랑이 끝이 없어서 기가 막힌대. 그런데 안 할 수는 없으니 그땐 그냥 고개 숙이고 하다 보면 언젠가는 끝나있더라는 거야. 인생이란 것도,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심사평

☞ 해외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낯선 노동 환경을 알게 해 주어 감사한 글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아립니다. 항공업에 취업해서 일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코로나로 노동을 그만둔 이후, 자신이 노동을 생각하는 시선이 달라진 점을 이야기한 것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임욱영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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