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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나 여기 있소

등록일 2022년02월07일 14시40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이름 없이 죽은 자들이 묻힌 야산, 귀신과 미친 여자, 뼈다귀들이 내는 소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도입부는 음산함과 귀기로 가득하다. 수락산 자락 아래 무덤들과 멀리 보이는 동네, 그곳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이미지 위로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 목소리는 이 동네의 이름이 뺏벌이며, 여기서 여자들이 많이 죽었고, 그 많은 죽음을 보며 살아남은 여자가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비장하게 받아들이려 하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곧 그 여자, 박인순이 등장해 씻고, 걷고, 말한다. 그녀는 누구이며, 이것은 대체 무슨 영화일까?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주인공은 경기 북부 기지촌에 사는 박인순 씨다. 그녀는 기지촌의 여성 노동자였고, 미군기지가 이전해 동네의 기억이 거의 사라진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으며, 이제는 폐지를 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술을 마시며 하루를 보낸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기지촌의 기억,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통상적인 다큐멘터리나 극영화의 틀로는 설명하기 까다로운 영화다. 역사를 개괄하는 것도, 한 인물을 조용히 따라가는 것도, 인터뷰의 형식으로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을 연기할 배우를 캐스팅해 인물의 사연을 재현하지도 않는다. 영화 속에서 박인순 씨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영화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 그녀가 마음껏 누빌 수 있는 허구적 틀을 마련한다. 이 안에는 만들어진 이야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인물이 원하는 이야기가 마구 섞인 채 들어있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하나의, 혹은 여러 개의 우화다.

 


출처 : 다음 영화

 

아주 큰 틀에서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면 이렇다. 우선, 뺏벌이라는 동네에 박인순이라는 인물이 살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존재가 그녀와 만난다. 한쪽에는 박인순을 찾아오는 현실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지촌 문제를 두고 국가 상대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술사 연구를 진행하려는 교수, 그 교수를 돕고 자기 작업도 하려는 미술 작가다. 다른 한쪽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동네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귀신들,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박인순과 특수한 관계로 만나는데, 그 만남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시선들의 곤란과 모순이 드러난다.

 

교수와 작가는 우리 사회가 약자와 피해자를 대하는 어떤 태도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박인순이라는 인물과 뺏벌이라는 공간, 기지촌의 역사 등을 이해하고 싶어 하고, 제대로 듣고 싶어 한다. 일반적인 역사 서술이 누락하고 삭제하는 소수자의 역사, 개인의 이야기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지배적인 역사 서술에 대항하는 방법이지만, 어딘지 엘리트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들은 박인순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교수의 말에 박인순은 횡설수설하며 일관성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이는 아귀가 잘 맞지 않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법정에서 유효한 증언이 되기 어려운 말들이다.

 

대신 박인순은 그림을 보여준다.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하며 생각하는 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뿔 난 얼굴, 드레스 입은 여자, 기묘하게 형상화된 임신. 어쩌면 진실은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부에서 정확히 관찰하고 제대로 듣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진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대상이 작업에 관여해야 한다. 교수가 등장하는 대목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라는 영화 작업 과정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한 사람의 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단지 카메라를 든 감독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이 자기를 보여줘야 한다. 이 영화는 창작자와 대상의 적극적 협업의 결과물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영화를 만든 김동령, 박경태 감독과 박인순 씨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두 감독은 기지촌을 배경으로 여러 영화를 만들어왔고, 그 과정에서 박인순 씨와 만났다. 박경태 감독은 <나와 부엉이>(2003)에서 일하고 그림 그리는 박인순 씨의 일상을 담았고, 김동령 감독은 <아메리칸 앨리>(2008)에서 현재의 기지촌을 조명했다. 두 감독이 공동 연출한 <거미의 땅>(2012)은 기지촌의 기억과 더불어 사는 세 명의 인물과 함께 공간의 역사를 다시 쓰는 독특한 다큐멘터리였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공간 그 자체보다 이야기에 더 집중한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건만, 어떤 이야기들은 세상 속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고 금방 사라져버리곤 한다. 영화는 이야기를 다시 쓰고, 새로 쓰고, 그 이야기에 질문도 던져보면서 이야기 자체에 대한 고민을 이어간다.

 

뺏벌을 찾은 영화 속 미술 작가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작 자기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실체를 마주하자 도망쳐버린다. 작가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버려진 클럽, 이제는 폐허가 된 공간들을 보고 그곳에서 영감도 얻는다. 하지만 그곳에는 귀신들이 살고 있다. 기지촌에서 죽어간 여자들, 하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여자들의 귀신이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전부 꽃분이라 불린다. 영화에는 귀신들이 모여 빛바랜 사진 하나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 윤금이 씨의 사진이다. 기지촌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모습으로도 기억되지 않는 다른 수많은 죽음들에 관한 질문 또한 던지는 대목이다. 작가는 도망쳤지만, 박인순은 귀신을 보고, 그들을 집에 초대하고, 그들과 동행한다.

 


출처 : 다음 영화

 

귀신의 등장과 함께 저승사자도 뺏벌에 찾아온다. 영화 속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죽은 자들을 저승에 데려가고, 방황하는 귀신을 소멸하는 존재들이다. 이제는 현실의 공무원들이 무연고 사망자들을 화장하는 덕에 직접 일을 처리할 필요가 많이 줄었지만 말이다. 이들이 죽은 자를 저승에 데려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저승 문턱을 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동료들의 무수한 죽음을 보아왔고, 그 자신도 죽음을 여러 차례 피했다고 여기는 박인순은 자기 힘으로 죽음에 맞서보기로, 저승 문턱까지 가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승사자들이 생각해내는 통속적인 이야기, 사랑과 눈물이 있는, 기구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에도 동시에 맞선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졌고, 기지촌에 흘러 들어가 열심히 일했고, 미군 남편을 만나 자식도 낳고 미국에도 갔지만, 지금은 홀로 폐지를 주우며 살고 있다. 세상은 이 여자를 가련하다고 말하거나, 아예 외면하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당당하고 무모하고 자신만만하다. 그녀는 세다. 자기를 규정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부수고 스스로 저승사자를 상대할 만큼 말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부지런히 걷는 박인순과 함께 그녀가 직접 만들어가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여러 방법으로 담는다. 이 영화는 ‘영화’라고 하는 것이 도취나 구경의 형태가 아닌 상호 간의 협력을 통해 주관적인 진실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그 진실을 함께 만들어가는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9년에 완성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올해 1월 정식으로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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