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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2019)

역사 한가운데의 여성

등록일 2021년11월02일 08시59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이란 태생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의 <마리 퀴리>(2019)는 20세기의 걸출한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과 연구를 다룬 영화다. 영화의 원제는 방사성을 뜻하는 ‘Radioactive’로, 인문학 연구자이자 아티스트인 로런 레드니스의 그래픽 노블 『방사성』을 원작으로 삼는다.

 

영화는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이며 첫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퀴리가 남편이자 동료인 피에르를 만나고 역사적 연구를 진행하며 삶의 마지막 장에 이르는 여정을 힘 있게 그려내고 있다. 동시에 20세기의 인류에게 방사능의 획기적 연구가 어떤 명암을 가져다주었는지 너르게 스케치한다.

 

<마리 퀴리>는 그러면서도 한 편의 대중 영화를 단순한 정보들의 모음이 아니라, 개인사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 살피는 탐구의 장으로 삼는 나름의 야심을 가진 작품이다. 이는 특히 마리 퀴리가 이민자 여성이라는 점과 떼어놓을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역사 한가운데의 여성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지켜봐야 하는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수많은 제약에 영향받고, 그것과 협상하고, 동시에 그러한 조건에 비타협적으로 반응하면서 역사에 예외와 돌기를 만들어내는 특정한 삶의 궤적을 그녀들을 통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존재. 물론 모든 개인이 그렇겠지만, ‘여성’을 개인의 그러한 특성을 더욱 확연히 관찰할 수 있는 일종의 장소라고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 출처 : 다음 영화
 

감독인 마르잔 사트라피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영화 이야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란에서 태어나 자라며 유년기에 이란혁명과 이란-이집트 전쟁을 겪고 유럽에서 공부한 그녀는, 이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만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때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페르세폴리스』를 발표해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후 뱅상 파로노 감독과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를 공동 연출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아카데미 시상식 애니메이션 부문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등 역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직업을 찾아 파리에 정착한 이민자이자, 전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삶을 찾고 지키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마리 퀴리와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마리 퀴리 역시 과학자가 되기 위해 폴란드에서 파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 여성이었으며, 세계 1차 대전을 비롯한 불확실한 격동의 시기를 살아낸 개인이었으니 말이다.

 

흥미롭게도 마르잔 사트라피의 어머니는 딸에게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며 롤모델로 자주 마리 퀴리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감독 또한 어느 인터뷰에서 “비타협적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 마리 퀴리라는 여자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마리 퀴리의 특성은 배우 로자먼드 파이크에 의해 매우 밀도 있게 표현된다. 그녀가 그려낸 마리는 대학 연구소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도, 스스로 길을 찾고 말지 결코 교수들한테 사과하지는 않겠다고 못 박는 여성이다.

 

마리는 말과 발이 빠르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으며, 조건 없는 호의와 동정을 거부하고, 자기 연구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누구보다 믿는 오만하고 긍지 높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곳을 절대 외면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냉소적이라고 평했고, 누군가는 현실적이라고 평했으며, 누군가는 위대한 과학자라고 평하는 그녀 삶의 기반에는 어쨌거나, 웃지 않고 세상을 쏘아보는 차갑고도 뜨거운 얼굴이 있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 출처 : 다음 영화
 

그녀의 과학 역시 당대에 전혀 편안치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우라늄을 연구하던 도중 광석에서 라듐과 폴로늄이라는 새로운 원소를 추출하며 기존 과학 상식에 도전한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였다. 그녀는 원자핵의 붕괴로 입자나 방사선이 방출되는 현상을 설명하며 ‘방사능’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썼고, 기존 믿음과 달리 원자핵의 내부 구조가 불안정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영화 속 마리는 라듐에 대해 강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주 독특하고 놀라운 원소죠. 행동해야 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니까요.” 이 말은 그녀 자신에 대한 설명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리 퀴리>의 흥미로운 지점은 방사능의 발견과 과학의 변화라는 20세기의 특별한 한 장면을 이처럼 괴짜 과학자 한 사람의 유산으로 묶어두지 않으려는 데 있다. 영화에서 마리 퀴리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그의 남편인 피에르(샘 라일리)다. 역시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였고, 마리가 그랬던 것만큼 학계의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마리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고, 협력의 가치를 믿었으며, 아내가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오를 수 있도록 애썼다. 영화에서 그의 존재는 단순히 특별한 한 사람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마리와 피에르가 종종 벌이는 언쟁과 사소한 대화는 과학에 관한 오랜 고민을 상기시킨다.

 

놀라운 발견 이후 이들 부부가 특허를 신청하지 않은 덕에 세상엔 방사능을 이용한 온갖 잡기와 활동이 넘쳐나게 된다. 그중엔 유령을 불러내는 의식도 있었고, 방사능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잡동사니도 있었다. 특허가 있었다면 더 좋은 연구소로 옮길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마리에게 피에르는 말한다. “그랬다면 우린 방사능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을 거야.” 마리가 사람들이 우리 과학을 이용하는 거라고 푸념하면 피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과학은 기존 과학을 이용해.”

 


△ 출처 : 다음 영화
 

인간은 세상의 그리고 역사의 어떤 퍼즐 조각일까? 인간은 세상을 이루는 무수히 많은 요소 중 하나이기에, 아무리 작고 미약할지라도 단 한 사람만 변한다면 세상은 이미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 한 사람의 인간이 온갖 상호작용과 축적된 시간의 산물임을 이해하는 일 또한 중요할 것이다. <마리 퀴리>는 격동의 20세기 한가운데 살았던 여성의 삶을 통해 인간사의 그와 같은 지점, 또한 협력의 산물로서의 과학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평생 방사능을 곁에 두고 살았던 탓에 마리와 피에르는 줄곧 죽음과 질병 가까이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안개 속을 걷듯이 아직 방사능의 효능과 문제점이 명확히 드러나지조차 않던 시기, 마리는 죽음의 문턱에서 꿈처럼 미래의 주마등을 본다. 거기엔 절멸의 원자폭탄이 있고, 암 치료의 가능성이 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있다. 영화가 전하려는 기초적인 메시지는 아마도 인류가 과학의 성과를 선하게도, 또 악하게도 써왔다는 것일 테지만, 결국 역사와 개인의 얽힘이야말로 마리 퀴리의 삶과 연구를 통해 가닿을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주제이자 질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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