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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섭은낭(2016)

결단의 무협

등록일 2021년12월02일 10시03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자객 섭은낭>은 대만의 영화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2015년에 완성한 무협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8세기 중엽 당나라, 지방의 번진 세력이 종종 중앙의 조정을 위태롭게 할 만큼 커지곤 하던 시기다. <자객 섭은낭>은 번진 중 하나인 위박에서 태어났으나, 그곳을 떠나 자객으로 길러진 섭은낭(서기)이 다시 위박으로 돌아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허우 샤오시엔은 줄곧 대만의 근현대사와 변화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굴곡 많은 역사를 통과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비정성시>(1989)에 담았고, 새로운 세기로의 전환에서 <밀레니엄 맘보>(2001)를 만들었으며, 각기 다른 시공간의 남녀 이야기를 <쓰리 타임즈>(2005)에 녹여냈다.

 

그런 그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무협영화는 일흔이 가까운 나이가 다 되어서야 <자객 섭은낭>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여기엔 물론 갈등, 자객, 검이 등장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전면에서 이야기되기보다 가려진 채 슬쩍 암시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선 줄거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셈이다.

 

대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여백, 말을 대신하는 호흡, 인물들 사이에 부는 바람과 흔들리는 촛불 같은 것들이 영화를 채운다. 관객 입장에선 인물의 내면을 분명히 알기 어렵지만, 절제된 무술과 깊은 시선이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대신한다. 고도로 절제되어 있으나 한편으론 격렬한 무협의 세계가 여기에 있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세세한 이해가 아닌 체험의 영역을 열어준다.

 


출처 : DAUM영화

 

대사와 상황을 부지런히 따라가는 것으로 줄거리를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이다. 당나라 공주인 가성공주는 과거 위박으로 시집을 왔다. 그녀는 조정과 위박의 평화로운 관계를 지키기 위해 결연한 의지로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아들인 전계안(장첸)은 은낭의 정혼자였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전원씨와 정략결혼 했다. 이후 은낭은 가성공주의 쌍둥이 자매인 가신공주에게 맡겨지는데,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가신공주는 은낭을 자객으로 기른다.

 

그들은 세상의 도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되는, 죗값을 치러야 하는 자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은낭의 무공은 이미 경지에 올랐으나, 문제는 그녀에게 여전히 인륜의 정이 남았다는 사실이다. 은낭은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타겟을 차마 처리하지 못한다. 가성공주는 그런 은낭을 가신공주가 죽고, 전계안이 주공이 된 위박으로 보낸다. 전계안을 처리하는 것이 은낭의 다음 임무다.

 

섭은낭의 무술은 화려하지 않다. 도리어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 숨어들고,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전체를 굽어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때문에 흔히 무협영화에서 기대되는 화려한 검술 대신 고요한 아름다움이 영화를 휘감는다. 시종 일렁이는 촛불과 휘장 속에서 은낭의 시선을 따라가는 듯한 카메라는 공간을 천천히 유영한다. 대사가 그리 많지 않은 이 영화에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건 이러한 움직임에 담긴 깊은 숨결이다.

 

그 안에 여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낯선 곳에서 외롭게 지내며 의지를 다잡았던 가신공주, 무술로 도를 이루고자 하는 가성공주, 집을 떠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객으로 살아가는 은낭, 전계안의 본처인 전원씨와 전계안의 첩인 호희까지. 이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감당하며 지키고, 또한 무언가 끊어내고 결단하며 살아간다.

 


출처 : DAUM영화

 

“싼샤에는 매일 많은 배와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 그들은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안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싼샤에 온 것입니다. (...) 지금 중국은 자기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 삶의 어느 순간을 칼로 내려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무협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입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변화 많은 중국의 삶을 끊임없이 영화로 만들어왔던 지아장커는 도시개발로 수몰된 싼샤에서 <스틸 라이프>(2006)를 만들며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무협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 않은 영화를 만들며 무협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이 말은 <자객 섭은낭>의 여성 인물들에게 고스란히 들어맞는다. 마음속에 품은 칼로 내려치는 삶의 한 순간, 결단의 길목. 일찍이 가성공주는 아들 전계안과 그 정혼자인 은낭에게 결단을 의미하는 장신구인 옥결 한 쌍을 남겼다. 자신의 유지를 이어 조정과 위박의 평화를 지키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과거를 단호히 끊어내고 새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칼을 쥔 것은 은낭이지만, 격변의 시기에 사랑을 지키고 스스로를 지키는 여자들 모두가 무협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은낭의 결단은 자신의 칼이 있어야 할 곳을 알게 되며 비로소 실현된다. 전계안을 죽이라는 명을 받고 위박에 돌아왔으나, 그녀는 우선 은신하며 상황을 살핀다. 이곳 또한 여느 역사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판단과 온갖 술수가 넘실댄다. 조정과의 평화를 위해 몸을 굽히라 주장하는 대신들은 좌천되어 먼 길을 떠난다. 은낭의 아버지가 그 호송을 돕다가 정적 무리에 습격을 당한다. 이들을 구해주는 건 은낭이다. 단도 하나만 들고, 그리 많이 움직이는 법도 없이 그녀는 여러 개의 목숨을 구한다.

 

한편 전계안의 본처인 전원씨가 임신한 첩 호희를 주술로 해하려는 음모 또한 벌어진다. 은낭은 이곳에도 나타난다. 무고한 생명을 구하고, 전계안에게 사실을 알린 뒤 모습을 감춘다. 목숨을 빼앗으라 보낸 곳에서 그녀는 사람들을 구한다. 영화에선 종종 은낭의 정확한 동선과 경로가 제시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여기서 저기로 순식간에 이동하는데, 아마도 그녀에게 이 여정이 자신의 칼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가는 길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출처 : DAUM영화

 

칼이 있어야 할 곳을 안다는 건 칼로 벨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과도 비슷할 테다. 영화 속을 가득 채우는 바람, 안개, 구름, 햇빛, 그림자와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되 보이지 않는 것, 칼로는 벨 수 없는 것들이다. 은낭은 결국 그 흐름을 따라간다. 그것이 그녀의 결단이다. 은낭은 자신을 자객으로 기른 가신공주에게 명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차마 그럴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 곁에 남기를 선택한다. 벨 수 있되 베지 않는 자, 벨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 끊어냄으로써 이어지는 길을 찾는 자, 섭은낭. <자객 섭은낭>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길목에서, 삶의 결단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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