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실제로도 쳇 베이커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였던 헤로인이라는 마약과 관련된 일화들이 있다. 20세기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그랬듯, 그 역시 마약과 현실의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고,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는 마약과 현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그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가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마약을 택하기도 했다는 건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본 투 비 블루> 역시 헤로인으로 인한 선택의 갈림길을 극 중에서 여러 차례 배치해둔다. 여기서 다시 약에 손대면 이제 사랑도, 사회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기회도 끝이라는 주변의 냉정한 충고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상황만 보면 절체절명의 순간인데도, 어쩐지 해결 과정은 맥이 빠진다. 관련 책임자들이 돌연 마음을 돌려 기회를 한 번 더 만들어주고, 큰 문제 없이 무사히 상황은 종결된다. 쳇 베이커가 아버지와 겪는 갈등 역시 비슷하다. 약쟁이 아들이 못마땅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실패자라고 부르는 아들의 갈등은 말다툼 이상으로 훨씬 크게 폭발할 여지가 있지만, 그 정념은 황량한 벌판 위로 그저 흩어지고 말 뿐이다.
정리하자면 <본 투 비 블루>는 허구적 설정을 집어넣으며 드라마틱한 전개를 만들었으나, 그 드라마의 밀도를 조율하는 솜씨는 그저 평범한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게 단순한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는 한 인물의 삶을 깊고 무겁게 다뤄보려는 야심이나, 그 시도가 생각처럼 이뤄지지 않아서 생겨나는 조바심 같은 것보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쳇 베이커의 삶을 지켜보는 여유로움과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애잔함, 짓궂음 같은 정서가 더 많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좀 더 밋밋하게 조율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니 이 영화의 설정과 전개가 상투적이라고 비판하는 말은 내용적인 측면에서만 유효할 것이다. <본 투 비 블루>는 오히려 실존 인물의 삶을 엄숙하고 무겁게 재현하는 것에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리한 계산의 결과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영화 감상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영화 속에서 제작되고 있던 ‘쳇 베이커 전기 영화’는 폭행 사건으로 인해 일찌감치 막을 내리지만, 흑백으로 촬영된 해당 장면들은 영화 곳곳에서 출몰하며 쳇 베이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영광의 과거를 떠올리고 비루한 현재를 감당하는, 주변의 평가에 따르면 ‘게으른 천재’였던 쳇 베이커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연출이다.
그런데 영화의 초반부 이 ‘쳇 베이커 전기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에서 재밌는 대사 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영화 속 영화가 재현하는 건 22살, 헤로인을 처음 접하는 쳇 베이커다. 그러나 그걸 연기하고 있는 쳇 베이커는 그때보다 훨씬 나이 들고 더 많은 경험을 한 중년의 남자다. 애드리브를 지적당한 그는 “어차피 다 가짜인데.” 하며 중얼댄다.
기실 아무리 정교한 전기 영화라고 해도 가짜는 가짜다. 재현이 실제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열심히 팩트를 찾아 헤매야 할까? 더욱 실감 나는 분장과 연기에 기대야 할까? 물론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더없이 위대한 전기 영화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한 편의 영화가 실제에 부딪히며 해봄 직한 시도가 단지 정밀한 묘사 그뿐인 건 아닐 것이다.
<본 투 비 블루>가 그 길을 아예 외면한 건 아니다. 이 영화는 당대의 공기를 재현하려고 애썼고, 쳇 베이커의 굴곡진 인생을 서사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배우인 에단 호크는 그의 외면과 내면을 닮기 위해 훈련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어떤 자의식, 주인공을 나른하게 구경하고, 연민하며, 가엾게 여기고 때로는 장난스럽게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가, 재미있게도 ‘전기영화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묵직하게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