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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묻어나는 노보라야 감동을 줄 수 있다.

등록일 2018년07월11일 15시40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오필민 칼럼니스트

 

내가 즐겨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노보 읽기다. 1980년대 중후반께 성수공단 주변에서 우연찮게 얻은 노보를 읽다 그 재미에 빠졌다. 조잡한 갱지에 인쇄 상태도 엉망이었던 노보였다. 잉크 냄새가 고스란히 밴 노보엔 지금처럼 반듯한 활자가 아닌 삐죽빼죽한 손글씨가 종이를 채웠다.

시도 있었고, 생활글도 있었다. 노동법 상식도 있었고, 임금에 관련된 주장글도 있었다. 직접 그린 삽화도 있었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행사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신문 기사처럼 그럴 듯하게 쓴 글은 없었던 거 같다. 총천연색 사진도 없었다.

재미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추는 듯했다. 글이 활자로 찍혀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살아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노동이 무엇인지, 노동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읽던 사회과학 책과 달랐다. 노보는 노동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우쳐주었다.

백여 명 남짓한 성수공단의 작은 공장인데 노보 편집위원들이 열 명 가까이 모였다. 모두 잔업을 마치고 온 터라 피곤할 텐데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눈은 초롱초롱했다.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라면을 사와서 끓였다. 한 쪽에선 글을 쓰고, 누군가는 타자기를 두들기고, 또 한 쪽에선 삽화를 그리고. 그걸 커다란 갱지에 오려 붙이는 게 요샛말로 편집 디자인 작업이다.

노보를 만드는 비용도 자신들의 호주머니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충당했다. 노보를 그냥 동료들에게 주는 게 아니라 돈을 주고 판다. 그 돈으로 다음 호를 만들고, 비용이 부족하면 자신의 월급에서 쪼개 보태는 식이었다. 그러니 노동조합 위원장 동향이 1면을 차지할 이유가 없었다. 노동조합의 든든한 지원자이지만 때론 가장 아픈 회초리를 드는 일도 노보가 했다.

요즘 노보를 들추면 조합원들의 삶이 묻어 있는 글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정보를 얻는 느낌은 들지만 감동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분노의 단어들이 문장마다 가득한데, 그 분노가 피부에 와서 닿지 않는다. 사람은 없고 사업만이 가득하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바쁘게 일했습니다.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어제도 일했고 오늘도 일했으며 내일도 일하겠습니다.

계절마다 노보를 펴내는 한 노동조합은 지난해 나온 노보를 연도만 바꾼 듯하다. 정기대의원대회 기사를 보면, 그야말로 날짜만 바뀐 듯하다. 3년 전 노보에는 날짜와 위원장 이름이 바뀌었다. 틀을 짜놓고, 날짜를 바꾸고, 사람 이름을 바꾸고, 인용할 연설 문구만을 바꾼 듯하다.

실제 컴퓨터 알고리듬으로 기사를 쓰는 시대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컴퓨터로 일기예보나 스포츠 기사를 쓰더라도 리드 문장을 비롯해 기사마다 색깔이 확연히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아래 두 글은 컴퓨터 알고리듬을 이용해 쓴 글이다.

 

베너는 해밀턴 A의 포시니 팀을 위해 타석에서 좋은 경기를 펼쳤다. 베너는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접전 끝에 주장 한 명을 불러들이고 1득점을 올렸다. 베너는 3회에 1루타, 5회에 2루타를 쳤다.

화요일은 W. 로버츠에게 굉장한 날이었다. 데번포트필드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이 3학년 투수는 퍼펙트게임을 펼쳐 버지니아팀이 조지워싱턴 팀을 상대로 2 대 0 승리를 거두었다.

 

바쁘다. 노동조합 간부는 주52시간도 부족하다. 조합 일을 자기 호주머니 털어가며 자원할 조합원도 없다. 하지만 노보를 만드는 기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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