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노조 파괴 공작은 마치 검색창의 자동완성 결과처럼 서로를 수식하고 있다. 삼성을 떠올리면 노조파괴가, 노조파괴를 떠올리면 삼성이 떠오른다. 이 씁쓸함은 우리에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이재용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할 때만 해도 우리는 시대가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목격하는 삼성은 아직도 노조파괴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2013년 당시 공개되어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노조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S그룹 노사전략> 속의 사원협의회
사원협의회의 전략적 육성, 노조 교섭권 무력화, 노조 조직력 축소의 3박자
삼성그룹은 오랫동안 삼성 내 노동조합이 설립되는 것을 저지해왔다. 노조가 움직이면, 회사도 움직였다. 노조가 설립될 것 같으면, 친사노조를 설립해 단체협약을 체결하여 노조를 무력화했다. 하지만 친사노조는 부당노동행위 제소 가능성이 높고 노조측에서 ‘알박기노조, 어용노조’라고 공격할 경우 그룹이미지에 타격을 입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사원협의회를 육성하고 위상을 높여 사원들을 장악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사원협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략은 이러했다. “사원협의회가 대표성이 있어야 노조설립을 저지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원협의회를 노조의 ‘대항마’로 활용하고자 했기에 사원협의회는 유사시 친사노조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된 조직이어야 했다. 사원협의회 구성원들의 활약으로 노조 탈퇴를 종용하여 노조의 조직력을 축소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또 사원협의회의 법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대표를 확보해야 한다며 법적인 부분까지 치밀하게 대비했다.
문제는 삼성그룹에서는 사원협의회를 노사협의회 역할을 할 조직으로 육성했으나, 법적으로 따져보았을때 사원협의회는 노사협의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조회에 불과한 사원협의회는 노사협의회가 될 수 없으며 그 성격과 구성 절차 등에서 법이 제시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삼성애니카손해사정노조 무력화 시도에 앞장선 한마음협의회
2020년 10월, 국회 앞에 선 삼성노동자들은 “노조무력화 전위부대 사원협의회를 해체하라!”며 노사협의회를 앞세워 노동3권을 침해하는 삼성그룹을 규탄했다.
당시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에서는 노동조합과 교섭을 진행하는 와중에 한마음협의회(사원협의회)와 회사 간의 임금인상 합의가 이루어져 파문이 일었다. 회사는 노조에게 한마음협의회와 진행한 임금조정을 조합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지 여부만 알려달라고 했다. 한마음협의회와 논의가 끝났으니 노조와는 달리 협상의 여지가 없다며 노조의 교섭요구를 일축한 것이다.
한마음협의회는 사원협의회, 즉 상조회에 불과하지만 사측의 비호를 받으며 아무런 걸림돌 없이 노사협의회 역할을 해왔고 자체 규정을 근거로 회사에서 사무실을 제공 받고 유급전임자를 두는 등 법외노조나 다름없는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법외노조 논란이 일자 오히려 삼성그룹은 사원협의회가 법외노조 성격의 단체라며 말을 바꾸었다.
2020년 노조는 그동안 노동자의 개별 동의 없이 사우회비(노사협의회비) 명목으로 급여공제가 이루어져 온 관행을 고발하고, 회사가 근로자참여법을 위반했다며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을 냈다. 근로자참여법에 따르면 노동자를 대표하는 위원은 노동자가 선출하게 되어 있다. 과반수노조가 있는 경우, 노조 대표자와 노조가 위촉하는 사람이 근로자위원을 맡아야 한다.
과반수노조가 없을 경우, 투표로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근로자위원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당선자 발표만 있을 뿐 선거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청의 조사에 따르면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은 적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선출되지 않았고, 그 결과 근로자위원 지위를 박탈당했다. 노동청은 근로자위원을 31일까지 새로 선출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노사협의회 규정을 정비하라고 주문했다. 이후 진행된 선거에서는 노조 임원이 근로자위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도 삼성은 변하지 않았다. 노조가 회사와 2021년 임금교섭을 진행하는 중이었던 지난 9월 회사와 한마음협의회는 <임금협약 체결식>을 진행했다. 마치 한마음협의회가 임금협약에 대한 단체교섭 권한이 있는 조직인 것처럼, 임금교섭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체결식을 진행하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하고 대내외에 홍보했다.
노조와 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발표와 홍보는 노조의 교섭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회사가 원하는 협상안을 강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노조의 운신 폭을 좁히고, 회사의 구성원들에게는 ‘삼성에서 회사가 교섭권을 인정한 노사협의회’ 내지는 ‘삼성에는 노동조합이 필요 없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속셈이다.
그보다 앞선 2020년 2월 노조는 천신만고 끝에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조합원이 늘어 과반수노조를 눈앞에 두었으나, 두 달간 200여 명이 줄줄이 탈퇴해 과반수노조가 되지 못했다. 노조는 노사협의회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에게 탈퇴를 요구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며 회사의 조직적 개입에 의한 노조 무력화 공작이라고 규탄했다.
10년 전에 작성되었고 이재용 부회장의 ‘노동3권 보장 약속’에 의해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던 노조파괴 전략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전략적으로 육성된 사원협의회가 노사협의회 역할을 하면서 노조의 교섭력을 무력화시키고 조직력을 와해시켰다. 삼성그룹의 노조파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삼성화재노조, 사원협의회의 발을 묶다
삼성화재노조도 회사가 전략적·조직적으로 육성한 평사원협의회가 조합활동을 방해해왔다. 평사원협의회는 친사노조로 전환하는 전략을 택하면서 노조 대항마로서 전면에 나섰다. 이에 삼성화재노조는 평사원협의회노조(이하 평협노조) 설립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고 회사와 평협노조간의 단체교섭중지가처분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삼성화재노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평협노조에게 노동조합 설립과정에 대한 중대한 하자가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들며 노동조합으로서의 자주성, 독립성 또한 결여 되고, 평협이 회사의 조직으로서 활동하며 진성노조 설립과 활동을 방해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평협노조가 노조가 아니라고 볼 소지가 크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은 삼성그룹의 노사관계, 특히 사측의 노조방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성화재노조의 활동을 방해해온 평협노조의 발을 묶었을 뿐만 아니라,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의 한마음협의회의 친사노조로의 전환 시도도 막을 수 있었다.
삼성화재노조는 이번 평협노조 일을 2021년도 국정감사에서 다루고자 한다. 국정감사에서 사원협의회의 친사노조 전환 과정에서 있었던 노조 활동 방해에 대해 진술하고, 삼성그룹을 넘어 한국사회 노사관계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국회에 법제도 보완을 요청하는 등 노력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