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민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상해나 질병으로 인해 일을 못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당장 우리는 병원비와 생계를 걱정하게 된다. 전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병원비와 생계를 걱정하는 것은 건강보험으로 보장되는 수준이 낮은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상해 및 질병으로 인해 치료나 재활을 받아야 하는 시민에게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 자체가 우리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자가 상병으로 인해 소득을 상실한 경우, 일정 정도 공적 사회보장제도로 보장해 주는 제도가 상병수당이다. 우리나라는 가구의 지불 능력에 비해 많은 의료비를 지출했는지 나타내는 재난적 의료비(catastrophic health expenditure)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그만큼 질병으로 인한 소득감소의 효과로 인해 아픈 사람들은 빈곤층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지난 2014년 송파 세모녀 사건이다. 가장이 질병으로 사망하고 큰 딸의 질환이 근로 불가능한 수준임을 인정받지 못해 기초보장수급자가 되지 못하자, 60세의 노모가 생계와 의료비를 부담하다 희망을 잃고 모두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따라서 질병으로 인한 경제활동이 부재한 개인 혹은 가구의 소득감소가 빈곤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상병수당은 매우 필요한 제도이다.
뿐만 아니라 소득보전에 대한 제도의 부재로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계층은 자영업자, 일용직 노동자 등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임시일용직 노동자들은 일터로의 빠른 복귀를 위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얼른 다시 소득을 벌기 위해 의료진에게 빠른 치료를 요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악순환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재활 및 사회복귀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만약 상병수당이 도입된다면, 국민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건강권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한국만 상병수당이 없다
사회보험을 최초로 도입한 독일은 독일 사회법전 제5편 법정 건강보험 제44조에 “건강보험 피보험자는 질병으로 근로능력상실이 되거나 병원, 예방 또는 재활시설에 입원해서 건강보험조합의 비용으로 진료를 받을 때 현금수당으로 보전하는 제도”로 상병수당을 정의, 시행하고 있다.
독일과 같이 사회보험제도로 운영하는 일본, 프랑스 등도 기본적인 사회서비스로 상병에 대한 소득보장을 명시하고 있다. NHS(국가보건서비스)로 운영하는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NHS 국가 중 대표적인 영국, 스웨덴, 스페인 등은 실업급여보다 높은 수준의 상병수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상병수당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1977년 500인 사업장에 직장건강보험을 도입하면서 정부는 국고지원 없이 사업주와 노동자 부담으로만 건강보험을 운영하고자 하여 급여의 범위를 현물급여인 의료서비스로 국한하였고, 상병수당과 같은 현금급여는 제외하였다. 결국 현재까지 임신·출산을 제외하고는 현금급여에 대한 보장은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법상에 상병수당을 도입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2000년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을 통해 제50조 (부가급여) 조항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임신·출산 진료비, 장제비, 상병수당, 그 밖의 급여를 실시할 수 있다”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시할 수 있다’는 표현의 강제성이 떨어지고, 관련법 시행형 제23조에 임신·출산진료비로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왜 상병수당이 도입되지 않을까?
우리사회에서 상병수당 도입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다. 1995년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와 보험급여 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이하 의료연대회의)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및 공단 일원화를 주장하면서 상병수당 도입을 장기과제로 삼았다. 200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통합하는 과정에서도 상병수당 도입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국회 일부 국회의원들이 상병수당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올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장관이 건보공단의 상병수당 관련 용역 결과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상병수당 도입에 대한 당위적 측면에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상병수당 도입을 위한 논의의 진척은 매우 더디기만 하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현금급여로 지급할 경우 발생하는 건강보험 재정확보 문제이다. 하지만 이는 크게 고려할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현재 건강보험이 계속해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2018년 기준 누적 흑자 20조 원이 넘는다. 한해 건강보험 급여비가 약 60조 원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미 상당한 액수의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누적 흑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상병수당과 같은 제도 도입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일 여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문재인 케어를 중심으로 보장성 확대 방안이 시행되고 있지만 상병수당 도입과 같은 적극적인 방식으로 보장성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시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국고지원을 높이는 것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보험 방식의 건강보험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들의 국고지원 비중을 살펴보면 네덜란드 55.0%, 프랑스 52.2%, 일본 38.8%, 벨기에 33.7%, 대만 22.9% 등 높은 비중의 재정부담을 국가가 책임지고 수행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보험료 예상수입액 20%(일반회계 14%, 국민건강증진기금 6%)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법의 미흡함으로 평균 약 15%만 지원하고 있다.
상병수당을 도입하여 국가책임 강화해야
국제노동기구(ILO)는 1952년부터 사회보장 최저기준에 관한 조약을 통해 상병수당 규정을 제시하고 있고,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사회보장권 강화 측면에서 상병수당의 의무급여화를 통한 건강보험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지난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와 ‘공공의 창’이 함께 상병수당 도입에 대한 설문을 진행하였는데, 하루 동안 1,003명이 응답했고, 그 중 76.1%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국민들이 상병수당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이 예방적, 치료적, 재활적 건강서비스를 받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문제가 없게 하도록 국가가 책임지는 적극적 정책이 필요한데,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상병수당 도입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병수당 도입, 더 이상 미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