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한 지역에 정착해서 일하고 싶었다. 전에 일하던 곳은 인사발령이 날 때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40대에 막 진입했을 무렵에는 외딴 섬으로 가게 됐다. 인사발령 때마다 어느 지역으로 가게 될지 모르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혼과 정착을 통한 안정적인 삶이 절실했던 나는 과감하게 퇴사를 선택했다. 그리고는 지금 일하는 EWP서비스에 오게 됐다. EWP서비스는 한국동서발전의 자회사로 발전소를 비롯한 시설의 경비와 환경위생 관리, 소방시설 점검 및 방재 등의 일을 담당한다.
▲ 박주선 공공노련 공공산업희망노조 EWP서비스지부 호남지회장
있지만 없는 나의 일터, 있지만 없는 유령노동자
한국동서발전은 당진, 울산, 동해 등지에서 발전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호남화력발전소 역시 한국동서발전에서 운영했다. 일터는 있지만, 사업장은 없는 곳이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이다.
호남화력발전소는 2021년 12월 폐지됐다. 2016년 6월, 미세먼지 관리 특별대책에 따라 정부가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10기를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결정된 일이었다. 1973년 가동을 시작한 호남화력발전소는 국내 최대 석유화학단지인 여수산업단지에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됐다. 거의 50년 동안 제 할 일을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국동서발전과 정부는 이 자리에 LNG 열병합발전소와 연료전지발전소, LNG 복합발전소 등을 차례로 건설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호남화력 인력 320명 중 290명은 다른 석탄화력발전소 및 LNG 발전소로 재배치되거나, 자산정리 업무를 위해 잔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발전사 노동자로 한정된다. 같은 발전소에서 일하지만, 자회사노동자인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발전소에 같이 있지만 없는, 마치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끝없는 방치에 노동자끼리 눈치싸움만
유령이 된 우리는 방치됐다. 방치된 우리는 우왕좌왕하며 똑같이 우왕좌왕하는 정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호남화력발전소의 폐지가 결정된 건 2016년이었고 애초 폐지가 예정됐던 2020년을 넘겨 2021년 12월 31일까지 호남 석탄화력발전소의 수명을 연장했지만, 정부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모습처럼 보였다.
일궈놓은 터전을 떠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우리 같은 저임금노동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EWP서비스는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으로 2019년 운영을 시작한 회사다.
2019년 전에 우리는 모두 용역노동자였다. 직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인 임금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다. 당연히 지역 기반의 일자리일 수밖에 없다. 200만 원 언저리를 받으며 여수까지 청소 일을 하러, 교대로 발전소 시설을 경비하러 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 동료의 대부분이 여수에서 나고 자랐거나 결혼과 함께 여수에 정착한 중장년층이다.
2020년쯤이었다. 호남화력발전소 폐지를 앞두고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 여수고용노동지청, 발전사와 협력사, 그리고 우리 자회사가 모두 모여 고용대책회의를 진행했다. 나 역시 호남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이자, 지회장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
발전소에서 일하는 모두를 불러서 하는 대책회의였지만, 우리 자회사노동자를 위한 대책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현장에 돌아가서 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막막한 회의가 끝나고 추가 회의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첫 회의가 막연했고 현장의 목소리를 정부가 들었으니 무슨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고용대책회의는 그때 단 한 번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방치되고 말았다.
우리가 아무리 막연해도, 정부가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못해도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다. 발전소 폐지가 가까워지면서 우리 현장에는 그야말로 전운이 감돌았다. 회사는 먼저 환경위생관리를 담당하는 위생직에 ‘잡 쉐어링(job sharing)’을 제안했다. 일하는 시간과 월급을 줄여 고용하는 인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위생직이었지만, 고령의 여성노동자가 다수인 위생직은 여수를 떠날 수 없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회사의 잡 쉐어링에 동의해야 했다. 그러나 일터의 면적에 따라 고용인원이 변하는 위생직 특성으로 호남화력발전소가 폐지되기도 전에 5명의 위생직 동료가 현장을 떠나야만 했다.
내가 일하는 보안직에서 4명이 한국동서발전의 다른 사업소로 전출을 가야 했다. 여수를 떠날 4명을 정하기 위해 우리는 눈치싸움을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발전소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모두 누구를 제쳐야 여수에 남을 수 있을지만 궁리하며 눈알을 굴렸다.
동료를 제쳐야만 남을 수 있다는 생존본능과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 사이에서 그저 참담할 따름이었다. 결국, 보안직 1명이 자진 퇴사하고 4명이 전출을 자원했다. 그렇게 5명이 일터를 떠났다.
호남화력발전소 폐지 3년, 지금의 탄소중립 정책은 얼마나 정의롭나?
호남화력발전소가 폐지된 이후인 2023년 10월, 국회에서 산업전환지원법이 통과됐다. 법에는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 및 디지털전환 등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기존 산업의 침체 및 실업 등 일자리 위험에 대응하여 선제적으로 근로자의 고용안정, 일자리 이동 및 노동전환을 지원함으로써 산업전환으로 인한 고용불안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호남화력발전소가 폐지된 지 3년이 지났다. 근거 법도 생겼다. 그런데 뉴스를 보면 아직도 석탄화력발전소 폐지에 따른 노동자의 고용안정 문제는 3년 전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작년 8월, 공공노련이 정의로운 전환을 주제로 공공노동포럼을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호남화력발전소가 폐지되는 과정과 폐지된 이후 나와 동료들의 삶에 대해 말했다. 여수시와 정부, 원청. 아무도 우리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냐며 왜 이제야 우리의 얘기를 들어주냐고 항변했다.
2022년 3월, 여수는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됐다.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호남화력발전소의 폐지 역시 그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발전소가 문을 닫고 노동자가 떠나면 그들을 상대하는 소상공인 역시 더는 버틸 수 없다. 그러니까 석탄화력발전소 폐지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 여수시 전체의 일인 것이다.
작년 포럼에서도 지역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독일의 루르(Ruhr) 지역에서는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지에 따라 지방정부가 적극적인 대안을 만들고 중앙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방식을 통해 효과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내년 12월에 태안의 석탄화력발전소 2기가 문을 닫는다. 정부는 2036년까지 전국 28기의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지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을 이제는 전국의 발전소 자회사노동자가 겪어야만 한다.
앞으로 폐지될 석탄화력발전소가 있는 지방정부가 현장노동자, 특히 우리 같은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는 노동자의 얘기를 반영해 적극적인 전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해야 한다고 하니 내놓는 하나 마나 한 직업훈련이나 취업 알선이 아니라 좀 더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내놔야만, 해고의 낭떠러지 앞에 선 자회사노동자의 삶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