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근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노무사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조법’이라 함) 제29조의4 제1항은 ‘교섭대표노동조합과 사용자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노동조합 또는 그 조합원 간에 합리적 이유없이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정하여, 교섭대표노동조합뿐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이른바 공정대표의무를 부담시키고 있다.
그런데 노조법에서는 사용자가 부담하는 공정대표의무의 범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함이 없다. 특히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복수의 노동조합 간 근로시간면제한도의 배분에 관해 갈등이 있는 경우 사용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후술하는 대상판결은 관련 사안에서 사용자가 부담하는 공정대표의무의 범위를 제시하였다.
사건의 경위
甲회사에는 A노동조합과 B노동조합이 있었으며,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쳐 A노동조합이 교섭대표노동조합이 됐다. A노동조합과 B노동조합은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가 이루어진 후 첫해에 노동조합별 조합비 일괄공제(이하 ‘체크오프’라 함) 조합원 수를 기준으로 근로시간면제한도를 배분받아 사용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다시 연간 근로시간면제한도를 배분할 시점에 甲회사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체크오프 조합원 수를 기준으로 근로시간면제한도를 배분하려 하자, B노동조합은 체크오프가 아닌 CMS 방식으로 조합비를 납부하는 조합원이 다수 가입되어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甲회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B노동조합은 ‘관계부처의 유권해석 또는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근로시간면제한도를 임시로 배분해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구체적인 CMS 조합비 납부 내역 자료 제공을 하지 않았다. 결국, 甲회사는 배분 시점의 체크오프 조합원 수를 기준으로 근로시간면제한도를 양 노동조합에 배분하였고, B노동조합은 임시배분으로 요구했던 시간보다 적은 시간의 근로시간면제한도를 배분받았다.
대상판결의 요지
서울고등법원은 “공정대표의무의 본래적 주체는 교섭대표 노동조합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그에 수반하는 사용자의 공정대표의무의 내용이나 대상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본래적 의무주체로서 교섭대표 노동조합이 단체교섭, 단체협약의 체결 및 그 이행 과정에서 부담하는 공정대표의무의 범위를 넘는 것이 될 수는 없다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 사용자가 부담하는 공정대표의무의 내용은, 단체교섭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며 체결된 단체협약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 어느 일방에도 치우치지 아니한 공정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소극적 의무라고 봄이 타당하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예컨대 관련 당사자인 노동조합들의 협의 결과에 따라 실행하도록 되어 있는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현안에 관하여 노동조합들 사이에서 견해 대립이 있는 경우 사용자로서는, 각각의 노동조합이 그들 자신의 주장이나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각각 제출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보다 객관성·타당성이 인정된다고 판단되는 처리 방향을 채택하면 충분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 일방 노동조합으로부터 이의제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주장이나 요구의 타당성 여부를 불문하고 다른 노동조합의 요구는 묵살한 채 노동조합들 사이에 협의가 성립하거나 관계 행정청의 유권해석, 법원의 재판이 있을 때까지 해당 현안의 처리 자체를 중단한다거나, 후견적 지위에서 적극적으로 제3의 해결책을 모색하여 노동조합들에게 제시해야 할 적극적 의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며, “배분 주체로서 노동조합들 사이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한도를 배분할 책무가 있는 사용자로부터 한도 배분을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조합원 수 및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의 제공 요청을 받은 다른 노동조합으로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리하여 해당 노동조합이 이러한 사용자의 요구에 응하지 아니함으로써 실제 조합원 수에 미달하는 조합원 수만을 인정받아 이를 기준으로 산정된 근로시간 면제 한도를 배분받게 되더라도, 이로써 사용자가 … 공정대표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하였다.
대상판결의 의의
근로자는 헌법 제33조에 따른 단체교섭권을 갖는다. 그런데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쳐 교섭대표노동조합이 된 노동조합은 배타적인 교섭권을 갖는 반면, 교섭대표노동조합이 되지 못한 노동조합은 현실적으로 독자적으로 단체교섭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노조법은 교섭대표노동조합의 권리 남용을 방지하고 교섭대표노동조합이 되지 못한 소수노조를 보호하기 위해 공정대표의무를 규정한 것인바, 이러한 입법취지에 비추어 본다면 ‘공정대표의무의 본래적 주체는 교섭대표노동조합’이라는 대상판결의 논리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노동조합 간 협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근로시간면제한도 배분과 관련해서는 사용자의 적극적인 개입이나 중재가 불필요하다 하더라도, 단체협약에 따라 조합 활동 시간을 유급으로 처리한다거나, 조합 사무실을 제공하는 것 등은 실질적으로 사용자의 권한으로써 가능한 것인바, 이 경우에는 소수노조에 대한 차별을 해소, 방지하기 위한 사용자의 역할이 중요성을 갖는다.
즉, 사용자로서는 일부 현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지위 있기에, 모든 사안에서 사용자의 공정대표의무가 소극적인 의무에 그친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사료된다. 참고로, 과거 서울고등법원은 “사용자는 교섭대표노동조합과 동일한 내용의 공정대표의무를 독립적으로 부담하고, 사용자라고 하여 교섭대표노동조합과 달리 교섭대표노동조합과 소수 노동조합 사이의 중립을 지켜야 할 소극적인 의무만을 부담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기도 하다(서울고등법원 2018. 6. 20. 선고 2017누86233 판결).
한편, 복수노조 간 근로시간면제한도 배분을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확인할 필요성이 크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체크오프를 통해 공개되지 않은 조합원이 다수 존재한다’고 하며, 구체적인 증빙자료는 제출하지 않은 채 체크오프 조합원 수에 따른 근로면제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의 배분을 요구함으로써 공정대표의무 위반에 관한 분쟁이 종종 발생해 왔다.
대상판결은 ‘노동조합은 근로시간면제한도 배분을 위해 조합원 수에 관한 증빙자료 제공 요청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명확히 판단한바, 추후 유사한 내용의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