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민 칼럼리스트

내가 즐겨 찾는 작가 가운데 오쿠다 히데오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남쪽으로 뛰어!』를 쓴 작가다.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은 읽는 이를 배꼽 잡게 한다. 그런데  배꼽 잡는 내용이 막상 알고 보면 심상찮다. 지지리도 재수 없고, 혹은 분노하거나 슬퍼해야 할 일들이다. 책을 읽으면 웃기는데 막상 그 이야기의 무게는 한 개인이 두 어깨에 짊어지기에 벅차다. 무겁고 딱딱하고 성난 일을 재미있게 푸는 재주, 오쿠다 히데오를 내가 즐겨 찾는 이유다.
 

얼마 전 서울시장이 서민의 삶을 체험하려고 옥탑방에서 한 달간 살았다. 이 무더위에 에어컨도 없이 살았다니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나온다. 월세가 얼마짜리 옥탑방이니 뭐니 손가락질하는 이도 있지만 정치란 말하기와 보여주기다. 손가락질만 하고 무엇도 보여주지 못한 이보다 훨씬 낫다.
 

올해 내가 자주 가는 동네가 바로 서울시장이 옥탑방살이를 한 동네다. 이곳에서 살아온 이들의 말로 하는 자서전을 채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말로 하는 자서전' 작업을 하는 까닭은 이 자서전의 주인공들이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환갑을 넘어 마을주민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있다. 이들은 서울시장의 한 달 체험을 평생 하고 있다.

자서전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채록하고 정리하는 이들도 동네 사람들이다. 전문 면담자(인터뷰이)도 작가도 아닌 이들과 함께 구술을 어떻게 진행할지를 함께 공부하며 작업하고 있다. 처음 하는 일이라 두려움과 막막함을 지녔던 면담자들의 초고를 엊그제 받았다. 훌륭했다. 전문 작가 솜씨 못지 않은 구술을 받았고, 이를 정리한 솜씨도 뛰어나다.
 

초고를 받고는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고민거리도 있다. 구술자들의 삶이 오쿠다 히데오 소설의 인물들처럼 인생이 꼬이고 꼬였다. 봄은 만나기 어렵고 겨울만 이어지는 듯하다. 천대받고 학대 당하며 버림받고. 배우지 못했기에 공장에서 일하다 한쪽 손을 잃어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이도 있다. 이 꼬인 삶을 그대로 드러내면 독자들의 가슴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천불이 일거다. 페이지 한 장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라 다음 쪽으로 넘기지 못하고 덮을 수 있다.
 

기록은 기록대로 온전히 보존해야 하지만 이를 다른 이와 나눌 때, 즉 보여주기는 정치인들처럼 '쇼'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소설가처럼 없는 일을 꾸며 집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자서전이지 않는가. 그래서 면담자들에게 다시 요청했다. 희로애락 가운데 '노'와 '애'만 이어지면 되겠느냐. 구술자의 삶에서, 그리고 '노'와 '애' 속에서도 '희'와 '낙'을 찾아야 한다. 이미 두세 번 구술을 마친 상태지만 다시 인터뷰를 하라고 부탁했다. 분노 속에도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법. 구술자의 말 속에 숨겨진 이것을 찾아야 한다. 구술자 자신도 미처 몰랐던 '애'와 '낙'을 면담자는 숨소리나 손짓 발짓, 행간에서 읽어야 한다.
 

나는 초고를 쓰고 난 뒤 탈고할 때 기준이 있다. 독자를 울린 문장이 있는가. 그 문장에 독자가 먹먹해져 다음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배꼽 잡게 웃기는 꼭지가 있는지를 검토한다. 최소한 두 번 웃기고, 한 번은 울려야 한다. 두 번 웃기지 못한다면 한 번 웃기고 두 번은 가슴 먹먹하게 만들었는가. 이래야 탈고를 마치고 출판사에 넘길 수 있다. 내가 만든 이 기준을 채우지 못해 외장하드에 갇혀 있는 원고들이 꽤 있다.

글에는 기승전결 이상으로 희로애락이 중요하다. 이게 글의 형식이다. 또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