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이라는 한해가 시작되었고 모든 사회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도 운동방향과 세부 사업들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여기에 임원선거까지 더해져 새로운 3년의 전략을 가다듬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마주할 3년은 과거의 3년과는 사뭇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경제침체와 전쟁의 위험부터 가속화되는 기후변화까지 거시적 위기의 징후가 뚜렷하고, 당장의 현실에선 서슬 시퍼런 권력의 칼끝이 노동운동을 노골적으로 겨냥하며 노동기본권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은 외부 작용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넘어선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정작 쟁점이어야 할 사안들에 대한 조직적 토론이 여전히 부족한 점은 아쉽다. 특히 노동공제회라는 한국노총의 새로운 전략에 대한 조직 내부에서의 조명이나 논박조차 부재하다시피 한 것은 사업실무자로서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지면을 빌어서나마 출범 2년차를 맞는 2023년 노동공제운동의 시대적 의미를 다시 돌아보고,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의 현황과 과제를 밝히고자 한다.
위기의 시대, 노동공제운동의 의의는
디지털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배정 받아 일을 하는 배달, 대리운전, 가사돌봄서비스 노동자나 단순정보입력 등 미세작업 노동자들이 우리 주위에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적어도 산재보험 적용은 필요하다며 ‘특고노동’으로 분류돼 부분적 보호만 받고 있다. 일부 업종의 종사자 외에도 용역계약 형태이지만 실질은 종속적 노동을 하고 있는 비임금노동자들도 급증했다.
이들을 통칭하는 합의된 표현조차 없지만, 한국노총은 기존의 표준적 고용관계에서 벗어나 일하는 사람들을 비정형노동자라 칭하며, 당사자들의 보호와 조직화 방식으로 노동공제회라는 오래된 모델을 차용했다.
먼저 비정형노동자는 사용자가 불분명하거나 특정할 수 있더라도 사용자의 책무를 실제 이행하도록 하는 제도의 즉각적 실현을 기대하기 어렵다. 때문에 사용자에 대한 교섭과 대항을 통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의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또한 이들 상당수는 사회보험이나 퇴직급여, 최저임금, 고용보호 등 기존의 사회적 보호 체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고용과 소득은 불안정하며 각종 안전사고와 질병 위험이 높고, 모든 책임과 부담이 전적으로 개인들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당장 효과를 낼 수 있는 현실적 보호방안이 필요했다. 이에 상호부조와 사회적 지원을 기반으로 당사자들 스스로가 경제적 위험에 대비하는 기초안전망 구축이 실효성이 클 것으로 판단했다.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 가능성이나 필요성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조는 플랫폼 알고리즘을 통해 실질적 사용자로서 노동을 지휘감독하거나 위장프리랜서 계약을 강요하는 기업들로부터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해를 지키는 여전히 위력적인 수단이다.
다만 고정적인 일터에서 일상적인 교류를 통해 자연스레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공동의 이해가 형성되는 전통적 노동자들과는 달리 저마다 각자의 공간에서 뿔뿔이 흩어져 일하는 비정형노동자들은 조직화의 기회나 요구 자체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했다.
노동공제회는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조직화의 계기와 자원을 제공할 수 있기에 새로운 조직화의 경로로서도 의의를 갖는다. 한국노총에서 노동공제운동은 플랫폼노동자와 프리랜서를 우선적인 참여주체로 시작했지만, 낙후한 산업단지 등의 영세사업장이나 5인미만 사업장 노동자, 알바나 단기계약 노동자 등 모든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에도 유용한 모델이기도 하다. 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가 목표했던 궤도에 안착할 때, 여러 업종과 지역, 대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커질 것이다.
노동공제회의 설립과 지원은 취약노동계층에 대한 조직노동의 계급적 연대로 평가할 수도 있다. 이는 시혜적 지원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일하는 당사자들을 수동적 객체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새로운 운동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제도적 보호의 확대나 경제적 지원의 강화만을 추구할 때 나타나는 대상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공제회 운동은 당면해서는 노동조합과 미조직 불안정노동자를 분리하여 고립시키려 하는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개악에 맞설 노동운동의 든든한 아군을 확대하는 운동전략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지금의 노동운동을 ‘기득권 집단의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여론몰이의 논리를 깨부수는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출범 2년차 노동공제회의 위치와 방향
앞서 언급한 노동공제회 설립의 여러 의의들이 출범 이후 현실화되고 있는가? 갖은 시행착오에도 무수한 사업과 활동을 통해 실천적으로 검증하며 그 가치를 스스로 빛내고 있다고 감히 평가한다.
공제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사업에 참여하는 많은 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들이 “비빌 언덕이 생긴 것 같다”며 환영하고, 아직까진 빈약한 사업들임에도 “쏠쏠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감사를 표한다. 직업훈련이나 건강검진을 받을 여유조차 부족한 현실에서 “이 기회에 나도 해볼까”라는 동기를 제공하고 있으며, 소통의 공간이 절실했던 이들에게 정보공유와 교류의 장으로도 역할하고 있다.
노조나 협동조합 등 조직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가사·돌봄, 대리운전, 배달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전국연대노조에 가입했고, 노조 설립을 염두하지 않았던 여러 프리랜서들이 공제회 사업에 참여하며 노총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높여가고 있다.
물론 지금은 한계와 어려움이 훨씬 많다. 자산형성과 직업훈련 지원사업의 혜택이 적지 않다고 판단해 단기간에 회원가입이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했으나, 복잡한 신청절차와 업무환경이 고려되지 않은 증빙방식 등으로 인해 당초 목표를 크게 밑돌고 있다. 초기 빈약한 설립재원의 한계를 회원들의 회비수입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전략이 틀어지며 운영비의 부족으로 계획했던 사업들이 축소되거나 지연되기도 했다. 다행히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산업공익재단 등 노사공동의 공익재단들의 지원으로 공제회 초기 기반조성을 위한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자산형성지원사업 및 건강검진지원사업 등 수혜자들이 생겨나면서 회원가입이 점차 확대되고 공제회 참여 업종도 확대되고 있다.
2023년 노동공제회는 기존 사업들의 참여시스템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전략적 맞춤형 홍보와 신규 업종 및 사업영역 발굴을 통해 회원 확대를 총력적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특히 플랫폼노동이나 프리랜서 일자리 수요가 큰 20대 청년, 30~40대 경력단절 여성, 50대 이상 고령자에게 공제회의 현재 각종 사업들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이들을 타켓팅으로 한 집중적인 회원가입 사업을 추진할 것이다.
안전환경조성 지원사업과 프리랜서 공정계약 지원사업도 공제회의 대표적인 사업영역으로 자리매김 되도록 관련 사업을 강화할 것이다. 공익재단들과 정부·지자체 지원사업과 연계하는 등 재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경주할 것이나, 노동조합들의 출연은 올해에도 공제회 운동의 주요 원천일 수 밖에 없다.
공제회의 인지도와 신뢰도, 회원가입과 사업참여의 확대는 공제회의 조직적 기반인 한국노총의 대표성과 영향력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노총 각급 조직들이 공제회 사업과 운동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연대와 지원을 강화하고, 보다 적극적인 활용방안까지도 함께 모색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