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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고 부지런했던 나의 스무 살

제4회 난생처음 노동문화제 수상작(노동수기 청소년부문 1등 한국노총상_김민정)

등록일 2023년02월06일 15시42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4년 전 스무 살의 나는 인생에서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고,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나의 첫 자취방은 보증금 500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 32만 원짜리 4평 원룸이었다. 끝에서 끝까지 여섯 발자국이 채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 방이었지만 나는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뻤다. 집과 독서실만 반복하던 수험 생활 끝에 찾아온 자유였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자취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버리는 것 하나하나 다 돈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마르지 않는 샘 같았던 휴지, 세제, 쓰레기봉투 같은 것들은 신경 쓰지 않으면 금세 떨어졌고 게다가 비싸기까지 했다. 거기에 식비와 각종 공과금, 새로 사귄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데 드는 돈까지 다 합치니 집에서 보내주는 생활비가 금방 동났다. 지갑이 늘 가벼웠다.

 

그러던 중 동기가 학교 앞에 새로 생긴 치킨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나는 당장 전화를 걸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에 수업이 끝나고 가게로 향했다. 오픈형 주방을 마주 보고 테이블이 4개 남짓 있는 작은 매장이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장님은 나에게 우선 치킨을 한 마리 튀겨주고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집이 멀지는 않아요?”, “지각하거나 결근을 하면 곤란한데, 책임감 있게 일해줄 수 있어요?” 같은 걸 물어봤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성실히 대답했고 다음 날부터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일하게 된 치킨집은 후라이드 한 마리에 8500원이라는 아주 저렴한 가격이 특징이었다. 초보 사장님은 밥집과 술집이 발에 채이는 대학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박리다매 전략을 택했다. 하지만 처음 한 달 정도는 손님이 너무 없어서 테이블에 앉아 기본 안주로 나가는 뻥튀기나 먹다가 집에 돌아온 적도 많았다. 그럴수록 사장님은 파리 날리는 가게를 찾아준 학생 손님들에게 음료수며 감자튀김이며 서비스를 잔뜩 주었다. 우리 가게는 점점 싸고 인심 좋은 호프집으로 소문이 났다.

 

저녁 7시쯤이면 사람이 몰려왔다. 사장님이 배달을 나가면 나는 매장에 혼자 남아 치킨을 튀기고 또 튀겼다. 서빙을 하고 손님이 떠난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원래 내 근무 시간은 일곱 시부터 열두 시까지였지만 점차 한시, 두 시로 늘어나더니 새벽 마감까지 가게를 지키는 게 보통이 되었다. 당장 가게에 주문이 밀어닥치는데 내팽개치고 “저 이제 가봐야 하는데…” 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쉴 틈 없이 배달을 돌고 돌아온 사장님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낭패가 된 얼굴로 나에게 얼른 택시 타고 집에 가서 뭐라도 먹으라며 현금을 쥐어 주곤 했다. 우리 집이 걸어서 십 분 거리라는 걸 면접 볼 때 말해 서로 알고 있었지만 나는 사양하지 않고 사장님의 미안함이 담긴 돈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가게는 장사 잘되는 집, 나는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내 생활은 점점 엉망이 됐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잠드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어떤 날은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기름 냄새가 밴 채로 침대에 누워 오 분만 십 분만 씻는 걸 미루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기도 했다. 싱크대엔 밥풀이 말라붙은 그릇이 쌓여갔다. 빨래를 널고 개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교에 가야 하는데 당장 신을 양말이 없어서 전날 벗어 놓은 걸 주위다가 세면대에서 샴푸로 빨고 드라이기에 대충 말려 신고 나간 적도 많았다. 이대로는 일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가지 않는 날에도 몸은 일으켜지지 않았고 침대에 누운 채 피로도만 쌓였다. 그런 상태론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이상했다. 일단 출근을 하고 나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아니,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솟아서 눈앞에 놓인 일들을 척척 해냈다. 하지만 집에만 돌아오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나 하나 생활한 흔적을 치우는 게 백 명이 먹고 마신 자리를 치우는 일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분명 방금까지 500cc 맥주잔 수십 개를 씻고 헹구고 말리다가 왔는데, 그게 힘들기는커녕 일부러 신경 써서 로고가 앞쪽으로 보이게 정렬해놓고 뿌듯하기까지 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출근하기 전 먹은 편의점 도시락을 쓰레기봉투에 집어넣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방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출근한 나는 부지런한 직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게으른 자취생이었다.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하소연을 했다. 내 고민을 한참 듣던 엄마는 그럼 출퇴근하듯 시간을 딱 정해 놓고 집안일을 해보라고 했다. 집안일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셈 치라고, 자기 자신을 알바생으로 고용했다고 생각해보라 했다. 반은 농담이었겠지만 그럴듯한 조언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집안일이 돈 받고 하는 일이라면 나는 얼마를 받아야 할까? 다른 아르바이트처럼 최저 시급? 난 살림을 잘 못하니까 더 적게 받아야 하나? 아니면 정말 하기 싫은 일이니까 더 많이? 그동안 주는 대로 받다가 내 노동의 값을 직접 매겨보려니 좀처럼 답이 나오질 않았다.

 

휴대폰이 엄마와 나의 통화를 엿들었는지 SNS에 1인 가구를 겨냥한 청소 서비스 광고가 떴다. 호기심에 어플을 깔았다. 이런저런 옵션을 선택하고 ‘견적 미리 보기’ 화면으로 넘어가니 4평 원룸을 깨끗이 치우는 데 오만 원이라는 청구서가 나왔다. 오만 원은 내게 아주 큰 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꼬박 다섯 시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집에 다섯 시간 동안 있는다고 집안일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과연 그 돈을 내고 청소 서비스를 사용하는 게 맞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확실히 엉망이 된 집에서 우울감에 사로잡힌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 그 시간 동안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집안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겐 거금 오만 원을 자취방 청소에 지불할 배짱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자기 방 하나도 못 치우는 게으른 인간이라는 걸 아직은 인정하기 싫었다. 청소 서비스를 이용하는 건 상상에서 그쳤다.

 

대신 나는 사장님에게 알바생을 한 명 더 뽑아 달라고 했다. 계속 둘이 하기엔 무리였다. 사장님은 밤새도록 한시도 쉬지 않고 오토바이를 모는데 배달 약속 시간을 넘겨 항의 전화가 오는 날이 늘어갔다. 이러다간 사고 나지 싶었다. 사장님은 안 그래도 주방 일 도와줄 사람을 한 명 더 뽑으려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내게 혼자 고생하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시간이 안 나 미루고 있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같은 과 친구에게 알바 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새벽 퇴근은 곤란하다고, 일을 시작한 지 세 달 만에 말할 수 있었다. 혼자 하던 일을 둘이 나눠 하니 주문이 밀리지 않았고 ‘숨 돌릴 틈’이라는 게 생겼다.

 

자연히 몸도 덜 지쳤다. 전에는 집에 돌아와 씻고 잠드는 게 다였다면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휴지로 훔치거나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주말엔 늦은 아침을 차려 먹고 어질러진 집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화장실 청소를 한 뒤 온 방 안에 풍기는 청결하고 독한 락스 냄새를 맡으며 딱 일이 줄어든 만큼 내 생활을 돌볼 에너지가 생긴다는 걸 새삼 신기해했다.

 

그렇게 난 일과 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조금씩 살림력을 늘려갔다. 첫 자취,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스무 살의 나는 돈을 벌고 생활을 가꾸는 게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지 배웠다.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나는 나를 위해 무거운 몸과 정신을 어떻게든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부모님께 맡겨놨던 생활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내 손에 덜어보니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무엇 하나 한 번에 되는 건 없었다. 부끄러운 실수를 반복하며 ‘학생이자, 노동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감각’을 조금씩 몸에 익혔다. 그렇게 게으르고 부지런했던 스무 살의 나는 1인분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 심사평

- 담담하게 자신의 일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그 안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를 사는 20대 청년들을 대변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김민정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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