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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같은 하루

제4회 난생처음 노동문화제 수상작(노동수기 일반부문 1등 한국노총상_양수빈)

등록일 2023년02월06일 15시52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올해 여름,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여러 아르바이트 자리를 물색했다. 직장에 다니던 시절엔 해를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반밖에 열리지 않는 창문 틈으로 간신히 팔을 내밀어 햇볕을 쬐는 게 전부였던 날들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오후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 문을 여는 떡집 겸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총 8시간 근무를 해야 했는데, 나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내게 '오후 3시 퇴근'은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떡집이 위치한 곳이 역사 안이었다는 것이다. 한낮의 햇빛이나 밝은 하늘을 그리워했던 나는 환기도 잘되지 않는 깊고 어두운 역 안에 틀어박혔다. 떡집은 개찰구 바로 앞에 있어서 출근 시간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출근 후 전날 남은 떡들의 재고를 확인하고 커피 머신을 세팅하고 있으면 어느새 손님이 찾아왔다. 아침 대용으로 떡을 먹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출근 시간을 간신히 넘기고 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었다.

 

매일 배달 오는 물류를 받아 정리하고, 출근과 동시에 해동시켜 놓은 떡을 꺼내 포장했다. 서른 가지가 넘는 다양한 종류의 떡은 그 종류에 따라 해동 방법과 포장 방법이 달랐다.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갔던 것은 직접 쪄야 하는 떡들이었다. 한 번만 쪄도 바로 찜기를 세척해야 했는데, 큰 크기 탓에 만만치 않았다. 찜기의 뜨거운 열기에 손을 덴 적도 여러 번이었다. 틈틈이 점장님께 상황을 보고하고 정해진 수량에 맞게 떡을 포장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곤 했다.

 

역사 안에는 당연히 창문이 없었고 환기 시설 또한 부족했기 때문에, 늘 꿉꿉하고 습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 정도쯤이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날씨가 급격히 무더워지면서 벌어졌다. 그날도 나는 찜기를 쉴 새 없이 돌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 A와 짠 것처럼 “쪄 죽을 것 같아”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다가 에어컨을 틀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다. 포스기 밑, 서랍 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장고 안까지 꼼꼼하게 살폈지만 에어컨 리모컨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A가 언니! 하고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A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검지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미끈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 공사하고 도배해 깔끔한 천장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에어컨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에어컨이 없었나? 그걸 왜 이제야 알았지? 찜기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열기에 얼굴이 벌겋게 익은 A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내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점장님께 에어컨의 행방을 묻자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뚫려 있잖아요, 여기.”

 

역 안이라 사방이 뚫려 있는데 굳이 에어컨이 필요하냐는 말에 나도 A도 할 말을 잃었다. 역사 안 가게 중에 에어컨이 없는 곳은 우리가 일하던 떡집이 유일했다. “떡 같네.”

집에서 가져온 부채를 한참 흔들던 A가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A가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은 곧 우리 사이의 은어가 되었다. 우리는 일하는 동안 불합리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맞닥뜨리면 떡 같네, 하고 중얼거렸다. 함부로 반말하는 손님도, 몇 개 먹은 떡을 환불해달라며 가져오는 손님도, 푹푹 찌는 가게 온도에 마스크 아래 땀으로 축축이 젖은 얼굴도 모두 떡 같았다.

 

‘한여름’과 ‘찜기’라는 조건에 붙은 ‘에어컨 없음’은 치명적이었다. 말 그대로 떡 같은 일. 언젠가 본 광고 속‘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나는 너무 오래 찌는 바람에 흘러내리는 떡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느낄 수 있던 바람은 오직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고 개찰구 밖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올 때뿐이었다.

 

떡 같은 일은 또 있었다. 가게 안에는 의자가 한 개밖에 없었고 나와 A가 그곳에 앉을 수 있었던 시간은 휴게로 주어진 30분뿐이었다. 그마저도 마음껏 쉬지 못했다. 휴게실처럼 분리된 공간이 없었기에 카운터 안쪽에 앉아 있으면 손님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왔다. 휴게 시간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게 됐다. 유독 바쁜 날은 휴게를 챙길 새도 없이 일해야만 했다. 다리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한가해진 후에도 A와 나는 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휴게 시간 외에는 앉지 말아달라’는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7시간 반 동안 서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른 척 앉아 있을까 싶기도 했으나, 점장님이 역사 안을 지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우리를 지켜본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시간 서 있어 아픈 다리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나는 우리의 노동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존중과 안정’이었다. 내가 이와 같은 하소연을 하면, 지인들은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봐”라고 말했다. 그럴까? 하고 응수했지만 나는 일을 그만두던 날까지 에어컨의 유무와 의자에 앉지 못하는 것, 직원들을 감시하는 행위 등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내 노동력은 이곳에서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커피를 내리고, 박스 가득 쌓인 떡을 꺼내 정리하고 쪄서 포장하고 판매하는 나의 노동은 타인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다른 이로 대체될 수 있었다. 내가 근무 환경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는 순간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그렇게 내 입을 막았다. 가게 로고가 그려진 스티커를 떡에 붙이는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도 '언제든 대체 가능한 노동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면, 대체되기 이전에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매번 다짐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떡집 맞은편에 놓인 전광판 너머의 세상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광고가 재생되는 전광판 너머에는 역에서 비치한 쓰레기통이 있었다. 매일 오후 두 시가 되면 허름한 차림의 노숙자 한 명이 나타나 그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는 쓰레기통 안으로 일말의 거리낌 없이 손을 집어넣어 한참을 휘적거리다 무언가를 꺼내 먹었다. 이따금 수확이 없어 보이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쓰레기통 옆에 멍하니 서서 떡집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겁에 질린 채 지켜보다가 그가 멀어지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다가와 떡을 훔치거나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과장된 상상도 했지만, 사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런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노숙자의 모습과 나의 모습, 그의 삶과 나의 삶은 겨우 전광판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 벌어지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다음 일을 구하지 못한다면, 돈을 벌지 못해 생활비를 충당하지 못한다면 나 또한 언제고 전광판 너머의 그늘로 몰려날 수 있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위기감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점장님이 장사가 잘 안된다는 이유로 직원 A의 근무시간을 일방적으로 단축했을 때였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이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고민 끝에 A와 나는 순차적으로 퇴사 의사를 전달했다. 나보다 일주일 먼저 퇴사한 A는 작별 인사를 건네며 내게 더 좋은 곳에서 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 좋은 곳이란 어디일까. 정규직에, 근무시간이 윗사람 마음대로 바뀌지 않고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앉은 채로 일할 수 있는 곳이면 더 좋은 곳일까?

 

마지막 근무 날, 한가한 가게를 지키던 나는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광고가 재생되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불이 꺼진 전광판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큰 앞치마를 입고 생기 없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선 낯선 얼굴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는 반대로 내 앞에 놓인 떡들은 얼마나 다채롭고 윤이 났는지. 비속어처럼 사용했던 게 무색하게도 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빛날 줄 아는 떡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새로운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이곳은 에어컨이 있으며 여덟 시간 내내 앉아 있을 수 있고 근무시간은 지정되어 변하지 않는다. 떡집의 환경과 비교한다면 이곳은 매우 좋은 근무처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내가 대체 가능한 노동자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퇴사한 사람의 빈자리를 금방 채우는 새로운 사람을 볼 때가 아니라 출근하기 위해 개찰구를 지날 때이다. 개찰구를 지나 출구를 향해 걸어갈 때면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 분홍색 등 화려한 색감의 떡들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던 한여름의 일상이 눈 앞에 펼쳐지곤 한다. 조약돌처럼 반들반들한 떡들 사이에 나 혼자 울퉁불퉁 툭 튀어나온 따개비처럼 느껴지던 시간들.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할 때마다 쏟아져 나와 밀려드는 파도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 행렬인지도 모르면서 저 틈에 휩쓸리고 싶다, 아니 휩쓸리고 싶지 않다 같은 생각에 흔들리던 시간을 잊지 않고 있다. 내 주위에는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친구도 있고 아예 일할 곳을 구하지 못해 방황 중인 친구도 있다. 나는 여전하다. 많은 일을 겪었고 환경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A가 말한 ‘더 좋은 곳’이 무엇인지, 더 좋은 곳에서 하는 노동이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대체 불가능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방법도 미래도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르바이트생도, 비정규직자도, 계약직도 모두 노동을 대가로 정당한 보상을 받고 안전하고 쾌적하게 근무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내 자리를 찾지 못해 고민 중인 나와 같은 따개비들에게, 전광판 너머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일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의 행방을 묻고 싶다. 기진맥진 녹아내린 떡 같은 하루였는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떡 같은 하루였는지. 원하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곳에서 어떻게 노동을 해야만 할까. 어떤 노동자가 되어야 할까.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오늘도 개찰구를 지나 일터로 향한다.

 

# 심사평

- 경험을 소재와 주제로 연결시켜 탁월하게 서술했다.

- 제목이 지니는 다의성이 매우 매력적이다. 가감할 데 없는 탄탄한 문장력과 지루할 데 없는 기승전결의 구성도 똑부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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