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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정일우(2017)

가난한 삶을 위하여

등록일 2021년06월07일 09시31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정일우 신부는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고, 1960년대에는 예수회 사제로서 한국에 건너와 철학과 영성 신학을 가르쳤으며, 1973년부터는 판자촌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도시 빈민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미국의 가족들에게는 조니(그의 미국명은 ‘존 빈센트 데일리’다)로, 한국의 동료들에게는 신부님으로, 또 때로는 능구렁이를 줄인 ‘능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2014년 6월 2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저 이 땅 위의 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또한 가난한 이들이 어우러져 사는 진한 공동체를 꿈꿨다. 철거촌에서 농촌으로 자신의 터전을 옮기면서도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소망이 바로 그러한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일찍이 상계동, 행당동과 같은 철거 지역에서 카메라를 들어 <상계동 올림픽>(1988), <행당동 사람들>(1994)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송환>(2003)으로 널리 주목받은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에서 인연을 맺은 정일우 신부에 대한 영화 <내 친구 정일우>를 2017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간단히 요약하거나 압축하기 어려운 정일우 신부의 삶과 활동, 성취 등을 두루 담고 있으면서도, <내 친구 정일우>는 생전의 정일우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소박하고 솔직한 태도를 지닌 영화다. 영화는 네 명의 목소리를 따라 진행된다. 그들은 각각 신앙인으로서, 활동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농부로서 정일우 신부의 곁에 있었던 다정한 벗들이다. 이들의 말은 정일우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이 말들은 그의 행보와 일생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면서도, 동시에 사적인 기억과 감정 또한 품고 있다. 이들이 회상하는 정일우 신부는 위대한 성직자이자 대단한 활동가이기도 했지만, 한없이 장난스럽고 자유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눈이 반짝반짝한 예쁜 신학생으로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어두운 현실과 달리 강단에서 옳은 말만 해야 하는 처지가 불편해 직접 거리로 나섰고, 이 땅의 수많은 빈자들, 제 몫을 빼앗긴 사람들과 친구가 됐다. 그런 그에 대한 기억을 꺼내놓는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사랑’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사제로서의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들은 정일우 신부가 ‘예수의 삶을 몸소 살았다’고 회고 한다. 그것은 그가 근엄하고 인자해서가 아니라, 늘 고민과 갈등이 많았기에, 피와 살이 있고 술도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던 사람의 아들이기에 그렇다. 신학생들의 이름을 전부 외워 “동수야”하고 각각 이름을 불러줄 정도로 적극적인 선생이었고, 손수 운전하는 트럭에서 신학생의 고민을 가만히 들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는 일화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삶’, 그것을 위해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삶’의 방식이다. 청계천 판자촌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도시 빈민의 삶에 아무런 경계도 없이 섞여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놀고, 먹고, 웃고, 울었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동지가 될 제정구를 만났고, 계속된 철거로 터전을 잃은 이들과 함께 집단 이주를 준비했다. 직접 손으로 지은 집에 살며, 문과 담이 없는 마을을 만드는 꿈을 그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꾸었다.

 

정일우 신부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한편으로 한국 도시 빈민의 역사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강단에 있으면서는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학생들을 위해 직접 농성에 나서기도 했던 그이지만, 하느님의 뜻은 결국 가장 낮은 곳, 가난한 자들 속에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성직자란 가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여겼고, 무엇이든 서로 함께하는 가난하고 소중한 공동체를 꿈꿨다. 그가 생각한 진짜배기 삶, 진한 공동체는 허울 좋은 선함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솔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솔직한 싸움을 통해 공동체가 튼튼해지는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곤 했다고 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수많은 기록 영상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도 더 전, 청계천에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과 가난한 이들의 집을 쓸어버리는 폭력의 풍경을 담고 있다. 때로는 신명 나는 마을잔치가, 때로는 집을 빼앗긴 설움과 울부짖음이 빛바랜 캠코더 화면을 찢을 듯이 흔들어댄다. 우여곡절 끝에 정일우 신부와 도시 빈민들이 함께 세운 공동 주택의 모습은 놀랍다. 그러나 후반부의 한 대목처럼 이제 “가난한 동네는 다 사라졌다.”

 


출처 : 다음 영화

 

<내 친구 정일우>는 한 사람의 대단한 일생을 다루는 데서 끝나지 않고 끝내 실패에 대해 말하기에 아름답다. 천주교도시빈민회, 천도빈이라 불리는 단체는 계속해서 빈민들과 함께 이런저런 활동을 해나갔지만, 88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대규모 철거 투쟁으로 사람들이 상계동을 비롯한 여러 철거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우리들의 찐한 공동체’도 곧 끝나게 된다. 정일우 신부는 상계동으로 향했고, 젊은 감독 지망생이었던 김동원 감독은 그곳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지인의 부탁으로 정일우 신부의 모습을 촬영하며 하루만 머물고자 했던 계획은 곧 3년간 그곳에 머무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감독은 무너진 잔해 속 얼기설기 엮인 천막 안의 정일우 신부를, 흙과 콘크리트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어제보다 더 가난해졌으니 잘 된 것”이라 말하는 정일우 신부를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실제로 텐트마저 빼앗긴 후 공동체는 더욱 결속되었고, 외부의 지원도 늘었다. 정일우 신부는 도시 빈민이란 강물 옆의 나무처럼 놀라운 생명력을 지녔다고 말하곤 했고, 감독은 “가끔 상계동이 천국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라며 고백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결국 집단 이주와 공동 주택 건설이라는 목표에 이르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외부의 지나친 지원이 그 결과에 일조했으리라는, 그리고 정일우 신부의 명성과 김동원 감독의 카메라에도 그 책임이 있으리라는 읊조림에는 안타까운 통증이 서려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다시 만남조차 갖지 않는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주민들의 차가워진 목소리도 들려준다. “기억도 안 나.” “되새기고 싶지 않아.” 놀라운 일이다.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원했고, 빈자들 곁에 평생 머문 정일우 신부의 삶에 영화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실패의 목소리를 새겨둔다. 감독은 말한다. “어쩌면 세상이 기억을 금하는 건 아닐까요. 가난한 동네는 다 사라졌고, 가난은 더 무섭고 부끄러운 것이 돼버렸습니다. (...) 신부님은 여전히 가난뱅이들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으시나요.” 1994년 정일우 신부는 충북 괴산에서 농촌 생활을 시작한다. 더 낮은 곳을 찾아,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 생활을 찾아 농촌에 이른 것이다. 풍물치고, 술 먹고, 놀고, 손님을 맞이하고, 농사일을 돕고, 그렇게 농촌에서 지내던 그는 단식기도의 후유증으로 10년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영화가 보여주는 말년의 그는 너무도 쇠약한 모습이다. 스스로 식사도 하기 어렵고, 치매 증상을 보이며 종종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영화는 그가 겪었던 쓰라린 실패와 실망도, 노쇠한 육체도 한 사람의 삶에 우연히 묻은 얼룩 같은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세상 속에 살기에 우리 모두가 끝내는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모순과 갈등을 정일우 신부의 삶 또한 품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영화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의 제법 긴 암전은 그러한 사실을 아주 깊게 각인하는 어둠처럼 느껴진다. 그 어둠이 걷힌 다음 정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한 장면은 그러한 모순을 끌어안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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