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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움>(2013)

영화가 미래를 그릴 때

등록일 2021년05월06일 17시38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미래를 그리는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나 보편적인 인간성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초기 발전 단계에서부터 현실의 모습뿐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자주 그려왔다. 물론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창작물이 만들어낸 그 미래는 어떤 경우에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혹은 발이 묶여있는 현실의 문제들이 해결된 더 나은 세상일 때도 있지만, 그보다 많은 경우 현실의 문제가 확장되고 심화된 디스토피아적 세계일 때가 많다. 영화는 그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스스로가 새로운 기술의 전시장이 되어 오기도 했다. 폭발적인 기술의 발전은 지금은 슬쩍 가려져 있는 갖가지 사안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되거나, 인간적인 물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처럼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설국열차>(봉준호, 2013)가 소재로 삼는 계급의 문제, <아바타>(제임스 카메론, 2009)에 드러나는 침략과 공존, 혹은 자아의 전이라는 화두 자체는 실은 그렇게까지 특별하고 희소한 소재는 아니다. <쥬라기 공원>(스티븐 스필버그, 1993)과 이후 시리즈가 모티브로 삼는 유전자 합성과 그에 따르는 책임 같은 것들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승리호>(조성희, 2020)나 <서복>(이용주, 2019)과 같은 작품들처럼 최근의 한국 영화도 그처럼 발전된 기술로 미래를 그리고 그 안에 고이는 현실적인 문제나 딜레마를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때 구체적으로 상상되고 표현된 미래의 모습이나 기술적인 볼거리는 풍성한 데 반해, 개별 작품이 담고 있는 문제설정이나 통찰은 단순하거나 다소 뭉뚱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미래세계를 그리는 여러 영화를 볼 때 그 간극을 생각해보는 것은 하나의 흥미로운 감상 방식이 될 것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엘리시움>(닐 블롬캠프, 2013)을 통해 좀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부촌 아파트의 이름을 연상케 하는 이 제목은 영화에 등장하는 집단 거주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구가 병들고 오염되며 인구가 폭증하자 부자들이 지구를 버리고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 당도한 별. 정확히는 별이라기보다 우주정거장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이곳이 바로 ‘엘리시움’이다. 영화의 배경은 서기 2154년이다. 지구는 핵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라기보다는 인류의 온갖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폐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은 건물들은 불타거나 뼈대만 남은 채 자리를 보전하고 있고, 가난한 자들은 땅에 다닥다닥 모여 산다. 눈 두는 곳 모두가 모래바람에 뒤덮인 사막 같다. 반면 엘리시움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녹음이 우거지고 온갖 편의가 갖추어져 있다. 고급 아파트의 광고는 종종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며 주거지의 가치, 더 나아가 은연중에 주거의 분리를 말하곤 하는데, <엘리시움>에서 다른 삶은 지구를 벗어나 아예 우주로 나가야만 가능할 수 있을 정도의 머나먼 거리를 전제한다. 물론 그 상승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가능할 리는 없다.

 

지구의 빈자들은 도둑질해서 먹고 살거나 엘리시움을 건설한 거대 회사에 고용되어 온종일 기계를 조립한다. 그런데 더 치명적인 격차는 의료에 있다. 엘리시움은 의료자원을 독점한다. 이때의 의료자원은 2154년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거대한 원통형의 기계에 들어가 누워있으면 인공지능이 신체를 스캔하여 골절부터 백혈병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병을 다 치료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 기계만 있으면 노화도 방지할 수 있다. 엘리시움은 병들거나 늙지 않는 세계다. 이 치료 기계는 엘리시움에만 있을 뿐 아니라, 생체 시민권을 기반으로 작동하기에, 지구의 사람들은 이중으로 그 기회를 박탈당한다. 지구인들은 일차적으로 우주선을 타고 엘리시움까지 날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엘리시움의 시민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맥스(맷 데이먼)가 있다. 지구에서 태어나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다가 상습적으로 차를 훔쳐 감옥에도 들어갔다 나온 사내. 가석방 기간에 매일 공장에 나가 기계를 조립하며 사는 그에게는 어릴 적 엘리시움에서의 삶을 함께 꿈꾼 소꿉친구 프레이(엘리스 브라가)가 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둘은 이제는 엘리시움에 간다는 터무니없는 꿈은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소란스러운 지구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출처 : 다음 영화

 

맥스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고자 분투하거나 민중들을 결집하려는 영웅은 아니다. 그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훔치거나 노동하고, 고된 하루가 끝나면 초라한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며,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에게 커피나 한잔 하자고 조르는 사람이다. 오히려 이 세계에서 반기를 드는 건, 당장 치료가 필요한 빈자들이다. 스파이더(와그너 모라)라는 사내를 중심으로 모인 자들은 비행 시스템을 해킹하고 불법 시민권을 발급해서 사람들을 무허가 셔틀에 태워 엘리시움으로 보낸다. 물론 험난한 여정이다. 이들 대부분은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이 엘리시움의 군대로부터 공격받아 죽는다. 운이 좋으면 살아남아 치료 기계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곧장 불법 이민자로 간주되어 다시 지구로 추방된다. 이 와중에 맥스가 공장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된 그를 회사는 강력한 진통제 몇 알만을 주고 쫓아내다시피 내보낸다. 도움을 요청하는 맥스에게 스파이더는 무기를 만들고 엘리시움을 건설한 회사의 사장 칼라일(윌리엄 피츠너)을 제거하고 그의 머릿속 데이터를 가져다주면 엘리시움에 보내주겠다고 한다. 한편 엘리시움의 국방장관인 델라코트(조디 포스터)는 더 강력한 힘으로 엘리시움을 지키고자 쿠데타를 결심하고, 칼라일에게 엘리시움을 뒤바꿀 수 있을 새로운 프로그램을 짜도록 명령한다.

 

<엘리시움>은 이처럼 살기 위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맥스가 엘리시움의 시스템을 전복하는 더 큰 일에 휘말리는 과정을 따라간다. 한두 명쯤 아무렇지 않게 폭사하는 교전 장면은 꽤나 잔혹하고, 지구의 사람들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행태도 그 못지않게 잔인하다. 영화는 그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설정의 큰 마디를 세부가 알차게 채우고 있다고 할 순 없겠다. 인물들은 충분한 내적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거대한 세계관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선택이나 사연들은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져 당혹스러움을 안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의료체계와 계급 격차라는 뼈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미래의 질병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르게 다루어지고, 미래의 신체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더 풍부한 상상력이 동반되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출처 : 다음 영화

 

한편 영화가 비추는 디스토피아 지구는 지금 중동의 모습을 고스란히 옮겨온 모양새다. 머나먼 미래, 병든 지구를 상상하고 있지만, 영화가 그려보는 암울한 세상이라는 것이 전쟁 한복판 중동의 어느 단편적인 풍경과 그토록 흡사하다는 점에 대해선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2154년이라는 꽤 먼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엘리시움>은 이처럼 현실의 풍경과 문제들이 거의 그대로 녹아있는 세계를 그려낸다. 그와 관련해 영화가 육체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다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골절, 방사선 노출, 총과 수류탄을 이용한 육탄전, 신체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생체 슈트 등의 요소는 끊임없이 육체적인 고통을 환기한다. 신체의 즉각적인 고통은 아주 먼 미래에서도 인간에게 본질적일까? 계급과 시스템의 문제를 자못 비장하게 다루는 <엘리시움>이 정말 천착하고 있는 건 그런 문제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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