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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봄날, 제주에서 4.3 역사를 마주하다

‘제12회 한국노총 평화학교’ 참석 후기

등록일 2024년05월09일 10시28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김태형 제12회 한국노총 평화학교 참가자(금속노련 SK실트론노조)

 

‘제12회 한국노총 평화학교’가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제주에서 열렸다. 참가 신청을 하고, 봄날 제주 기행에 한껏 들떴다. 교육 내용이 제주 4.3 역사 기행이라고 해서, 4.3 사건 검색을 해보았다.

 

4.3 사건은 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없고, 생소했다. 포털과 미디어 검색창에 ‘4.3 사건’ 키워드를 넣었다. 자료가 많지는 않았는데, 언뜻 보기에도 너무 다양한 시각으로 해당 사건이 묘사되고 있었다.

 

혹시나 가짜 뉴스거나, 진실이 오염된 자료이진 않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제주로 출발하기 전날, 오히려 진실에 대한 갈증은 깊어졌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수만 명의 인명피해가 난 사건이라는데, 왜 전혀 몰랐을까.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설렘으로 가득했을 마음이 평소와 달랐다.

 

몇 시간 뒤 ‘죽음의 섬’ 제주의 역사를 직면하기까지 의문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부슬비 속에 제주 공항 착륙...설렘 대신 아픔을 예감하다

부슬비 속에 제주 공항에 도착해 한국노총 제주 지역본부 대강당으로 이동해 평화통일 교육이 이어졌다.

 

김남훈 4.3기념사업회 평화기행위원장은 평화통일 교육에서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됐다”고 했다.

 

이어 “국가 폭력에 의해 4·3사건 전기간 동안 희생자 수는 2만 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며, 당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한다며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봉기가 일어났고, 결국 5.10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는 투표수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며 “76년 전 미국 등 강대국의 분할 점령 의도, 단독정부 수립 등 한반도 분단 상황과 일제 패망 후 국내 자본가의 폐단, 서청의 횡포 등으로 통일 지향의 4.3 항쟁은 필연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이 있었지만, 여전히 미진한 진상규명을 위해 4.3 시기 미군정 등 작성한 미국 문서를 포함해 추가 진상보고서 마련 등이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의 강의를 들으며 간절함을 느꼈다. 더 쉽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려주고자 마음을 알 수 있었다. 76년이 지나도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아, 여전히 4.3 사건에 이름이 없다고 하니 ‘혹시 나의 외면으로 역사는 여전히 왜곡되어 온 것이 아닌가’는 엄숙한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4.3 평화공원... 희생자 위령비와 백비

평화통일교육 후 4.3 평화공원을 방문해 희생자 위령비에 참배했다. 같은 성을 가진 온 가족, 온 마을 사람들이 위패가 가로세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온 가족이 같은 날 같은 시간 희생됐다. 온 가족, 마을 전체가 희생되어 제주도 내 각지에는 4·3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들이 남아있는데, 이는 4·3으로 인해 소실된 마을, ‘잃어버린 마을’이 많다. 4.3은 현재진행형이다. 4.3 평화공원 전시관 안에는 ‘백비’가 놓여있다. ‘백비’란 어떤 연유로 이름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고 한다. 4.3 사건에 아직 이름이 없다고 한다.

 

진실규명을 위해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빨갱이’ 낙인과 ‘사상검증’으로 역사 규명은 지체되었다. 누워있는 백비를 보고 있자니 죽어서조차 씌워진 ‘이데올로기’에 갇혀 명예마저 회복 못한 희생자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말 못하게 된 희생자들의 억울함은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야겠다’ 다짐해 본다.

 


섯알오름 학살터, 무등이 왓, 큰넓궤, 백조일손묘역...제주 곳곳이 학살터

둘째날은 첫날과 다르게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너무나 화창한 날이었다. 제주 곳곳의 학살터를 방문했다. 관광으로 다녔던 오름, 폭포, 해변, 심지어 공항과 제주항마저 모든 곳이 학살지였다. 76년 전 ‘죽음의 섬’ 제주의 처참함이 눈앞에 그려졌다.

 

초록이 만개한 섯알오름에서 1950년 8월 20일, 제주 4.3사건의 막바지이자 6.25 전쟁 초기에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미리 잡아 가두는 경찰의 예비검속 과정에서 252명이 대량 학살됐다. 6년 후에 유해발굴이 이뤄졌지만, 뼈들이 뒤엉켜 있어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어 당시 유족들은 공동으로 부지를 매입해 유해를 안장한 후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백조일손묘비 앞에서 희생자에 참배했다. 유가족 한 분을 뵈었다. 86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시며 본인의 사연을 말씀하셨다. 당시 14세의 나이에 형님 두 분께서 학살의 희생자셨다고 했다. 어르신은 본인의 최후까지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일들은 잊어서 안되며, 후손들에게 정확한 역사를 알리고자 한다고 하셨다. 기억하는 일과 정의를 세우는 일, 모두 과제로 남은 듯하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정 실시...그리고 민·관 총파업

4.3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945년 해방 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와 일제하 적폐라는 모순 속에서 벌어졌다.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를 당시 미군정과 응원 경찰은 반대했다. 자주와 자립, 민생에 대한 제주도민의 열망 표현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결국,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은 총격을 가해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15세 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민심은 악화됐다.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에 대해 민·관 총파업이 시작됐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나에게 총파업이라는 단어는 익숙해 관심이 갔다.

 

당시 미군정이 친일파를 행정 요직에 배치하는 등 기득권층을 위하는 모습에 불만이 쌓였던 제주도민들의 민심도 총파업의 원인으로 보여진다. 해당 사건을 들여다보면 지금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고 여기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반노동, 반민생 정책을 보면 마치 노동자와 국민을 적대시하는 느낌이다. 불의한 권력과 모순에 저항한 제주도민의 숭고한 정신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기득권과 강자를 대변하며 약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억압하면 권력의 말로가 어떻게 되고, 역사는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4·3의 정명을 위해

4.3평화학교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통일을 굳이 꼭 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부끄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주변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타의적으로 분단되어있는 현실에 모르는 사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제주 4.3 희생자들이 바랬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그리고 4.3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76년을 인내해온 제주도민의 바램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제주도민의 위대한 희생을 추모한다는 것의 무거움을 느낀다.

 

여전히 전쟁 가능성이 가장 큰 땅, 우리 삶터의 위기가 절실히 다가온다. 아직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과제는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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