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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을 탐험하는 영화, <너를 정리하는 법>

최성규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등록일 2021년03월04일 10시53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출처 : DAUM 영화

 

“미니멀리즘은 불교와 유사하죠. 집착을 버리는 거예요.” 텅 빈 공간 위로 낮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온다. 흰 옷을 입은 주인공이 순백의 공간에서 곧게 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여긴 집이었어요. 집을 사무실로 개조한 거죠. 세간살이는 다 버렸어요. 쓰지 않는 물건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요령을 묻는 인터뷰어의 마지막 질문이 이어지고 주인공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너를 정리하는 법>(2019) 는 오랫동안 살아온 집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웨덴에서 3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공 진(추띠몬 쯩짜런쑥잉)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미니멀리즘 철학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로 데려가 줄 거라 믿는다. 집을 치우면서 번번이 가족과 부딪히고, 물건을 처분하면서 연락이 끊긴 친구들과 옛 연인을 다시 만나는 상황에 놓인다. 나와폰 탐롱라타라닛 감독은 급변하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태국의 풍경과 새로운 출발을 앞둔 청춘의 갈등과 성장을 담담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진이 정리에 매달리는 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본인뿐만 아니라 과거에 갇혀 살고 있는 엄마와 오빠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출판의 시대는 갔으니 책은 버려야 하고, 스트리밍을 기반으로 한 애플뮤직과 스포티파이의 시대이므로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음반들도 필요가 없다. MP3, VHS 등의 낡은 재생장치들, 인화된 사진과 학창 시절 성적표도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피아노 역시 새로운 세대인 오빠와 나를 위해 자리를 내줘야 한다. 진은 오래 간직했던 물건들을 사정없이 버리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대부분 가족들과 공유된 것이거나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어 계획은 계속 어긋난다. 결국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제 주인을 찾아주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물건에 깃든 추억들이 발목을 잡고 외면했던 과거를 대면하게 된다.

 


출처 : DAUM 영화

 

영화는 딜레마에 빠져가는 주인공의 상황을 촘촘한 플롯으로 설득한다. 망설임 없이 물건을 버리는 진을 멈춰 세운 건 리모델링을 시공할 담당자이자 오랜 친구인 핑크(팟차 킷차이차로엔)다.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위해 가능한 많이 버릴 것을 요구한 핑크는 쓰레기 더미에서 어릴 적 진에게 선물한 음반 CD를 발견한다. 차라리 돌려줬다면 덜 기분 나빴을 거라는 핑크의 충고는 쓰레기 더미들에서 비로소 추억을 건져 올린다. 오빠가 내놓은 짐에서 어릴 적 직접 뜨개질해 선물한 목도리가 발견되고, 인사도 없이 이별을 통보한 옛 연인의 물건 앞에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소급된다. 진은 결국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봉투를 다시 열어 물건의 주인들을 찾아 나선다. 이 물건을 돌려주는 게 맞긴 한 걸까. 쌓인 물건들의 무게만큼 되돌려주는 과정도 쉽지 않다. 어떤 친구는 만나자마자 화를 내고 또 어떤 친구는 돌려준 것보다 더 많은 물건들을 들고 나타난다. 시간이 봉합했거나 알지 못했던 상처들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헤집어진다.

 

<너를 정리하는 법>은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1.목표를 정하고 영감을 얻을 것, 2.추억에 잠기지 말 것, 3.냉철해질 것, 4.흔들리지 말 것, 5.더하지 말 것, 6.뒤돌아보지 말 것. 영화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는 일본 작가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을 전경으로 세우고 있지만 물건에 깃든 추억과 관계를 들여다본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태국 사람들의 삶과 가족, 세대의 쓸쓸한 뒷모습을 포착한다. 때때로 발견되는 낯선 장면들은 영화를 곱씹어 보는 경험을 주기도 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의 피아노를 팔고 길가에 주저앉은 진에게 어디선가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장면이 있다. 이 고함소리는 미래의 시간인데,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근 진을 향해 소리치던 어머니의 절규가 미리 도착한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찾아온 사운드가 제 시간을 도착했을 땐 오히려 소리가 소거된다. 이 같은 시간의 불일치는 익숙해진 시공간을 흔들어 깨운다. 그런가 하면 도입부에서는 주인공의 감정이 불일치한다. 주인공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면에서, 비교적 평범한 전개인 듯 보이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다시 이 도입부를 살펴보면 어딘가 어색한 공기를 느끼게 된다.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이 감정의 불일치를 알아챌 수 없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끝내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정리를 마친 진은 텅 빈 집에 앉아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물건은 떠나보내도 물건에 담긴 추억은 모질게 버려지지 않는, 회한과 후련함이 애처롭게 격돌하고 있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 결말을 치러낸 주인공의 시간이다. 쓰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 한다는 진의 의뭉스러운 태도는 마지막 장면의 그것과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출처 : DAUM 영화

 

태국의 신예 감독 나와폰 탐롱라타라닛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전작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와 기억의 간극을 독특한 촬영 방식으로 사유한 데뷔작 <36>(2012)은 36개의 쇼트 혹은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고, <마리는 행복해>(2013)에서는 실제 방콕에 살고 있는 여고생의 트윗 410개만으로 구성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최근작 <너를 정리하는 법>은 비교적 정적이고 따뜻한 정서를 담은 청춘, 성장 영화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소개하는 데 있어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비움의 미학인 미니멀리즘을 소재로 한 이번 작품은 영화 형식을 탐구해 온 그에게 또 하나의 실험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영화는 빈 공간을 채우는 작업이다. 텅 빈 공간에 소품과 인물을 놓고, 조명을 사용해 곳곳에 빛을 묻혀 어둠을 일깨우고, 수많은 사운드와 문장을 선별해 서사를 불어넣는다. 이 이야기가 어쩐지 의뭉스럽다면, 계속해서 무언가를 비우기 위해 뛰는 인물을 손에 든 감독이 영화 속에서 벌이는 탐험기라는 생각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 빈 공간에서 출발하는 영화가 빈 곳을 향해 분투하는 인물을 만났다는 상상은 이 영화를 조금은 낯설게 보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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