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세계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궐기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유엔은 1977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부터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2018년 2월 20일에는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양성평등기본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2018년부터 3월 8일이 법정기념일인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되었다.
1908년 3월 8일 당시 미국의 1만 50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 여성의 선거권 쟁취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먼지가 가득하고 쉴 곳조차 없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하루 12~14시간씩 일했지만 임금은 남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시민의 기본권인 선거권도 갖지 못했었다. 이때 시위에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쳤는데, 빵은 남성과 비교해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성들의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시위를 계기로 의류산업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 등 여성들의 폭넓은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빵과 장미를 제대로 받고 있을까? 먼저, 여성들의 ‘빵’을 살펴보면, 공식적인 통계를 통해 드러나는 상황을 보면 현실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잘 알려져 있듯이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 남녀 임금격차 비율은 오랫동안 부동의 1위이다. 2019년 남녀 임금격차 비율은 32.5%로 OECD 회원국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수준의 여성 고등교육 이수율을 보이고 있는 국가인데 최하위 수준의 남녀임금격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사례라고 한다. 또한 대졸 여성들의 취업률이 OECD 최저수준이라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노동시장에서는 저학력 여성들의 경제활동 기회가 더 많고, 그 결과 여성이 저임금 노동시장에 집중되어 성별임금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남녀간 직접적인 임금차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여성들이 주로 중소기업에 고용되어 있다는 점도 성별임금격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한편, 여성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시장에 도전하는 순간 직, 간접적인 채용 성차별에 의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취업이 되더라도 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노동시장에서 배제되는 좌절을 다시 겪게 된다. 우리나라 여성 고용률은 2016년에 56%로 통계작성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로 계속 유사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남성 고용률 78%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특히 여성의 고용률은 결혼·임신·출산·육아 등의 경력단절이 발생하는 30대 후반을 기점으로 M자형의 모양을 보이는데, OECD 회원국 중 30대 여성 고용률이 갑자기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곳은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한다. 2016년 우리나라 여성의 고용률을 보면 20대 후반이 69.5%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이어서 40대 후반(68.6%), 50대 전반(65.9%)순으로 높다. 즉, 여성과 남성의 고용률 격차는 40대부터 다시 줄어드는 모양새를 보이는데, 이러한 상황은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던 중장년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일자리에 불안정고용형태로 취업하는 현상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준다.
비정규직 여성일자리 중 특히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 중 여성이 집중되어 있다는 통계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9년 8월 기준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는 주로 여성(73.3%) 임금노동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건 및 사회복지서비스업(31.2%)과 공공행정(18.8%), 교육서비스업(12.7%)에 종사하고 있다. 초단시간 노동자의 경우 유급휴가, 주휴수당, 퇴직금 등을 받지 못하며, 산재보험을 제외한 사회보험을 적용받지 못하고, 「기간제및단시간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상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등 노동법 및 사회보장법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한다. 여성 집중 업종인 보건 및 사회복지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중요성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두드러지게 부각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는 여전하다. 단적인 예로, 지난해 3월 코로나19에 걸린 환자를 돌보던 77살의 간병 노동자가 숨졌는데, 당시 환자를 돌보던 간병 노동자가 받은 시급은 4,200원에 불과했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18년 제8차 한국정부 심의 최종 견해에서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하게 성별 임금격차가 지속되는 것에 대한 우려, 초단시간 노동자의 여성비율이 70.2%이고 그들이 노동법과 사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과 일정 기간 이상 고용보험에 가입한 사람에 한해 보장이 이루어지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동 위원회는 앞서 2011년 제7차 한국정부 심의 최종 견해에서 저임금 분야에 여성이 집중되어 있고, 경력 단절 및 시간제 직업에의 종사 등 가정 및 가족에 관한 책임이 주로 여성에 맡겨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바 있다.
한국 여성들은 ‘장미’를 받고 있는가? 제헌 헌법 제정 당시부터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성이 참정권 보장을 외쳤던 이유는 단지 형식적인 투표만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당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지위,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개선하고, 더 나아가 정치적, 경제적 영역 전반에서 남성과 동등한 참여가 실현되어야 여성 참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처절하게 전개되었던 투쟁이 진정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매년 고용노동부가 발표하는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ffirmative Action(AA))’ 분석 결과에 따르면 공공·민간기업 내 여성 관리자 비율은 수년째 20%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KOSPI 상장기업의 여성 등기임원비율 역시 외국에 비해 특히 현저하게 낮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고위직 여성 비율을 늘린다는 것은 기업 내 여성의 대표성 제고와 기업지배구조에의 여성 참여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여학생들과 젊은 여성들에게 롤모델로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편, 노동조합의 경우, 여성 조합원 비율도 낮지만, 여성 조합 간부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노동자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문제의식과 노동자로서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사업장 내에서의 지위 및 경제적·사회적 지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를 통한 여성노동자들의 연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 UN 사무총장 갈리(Ghali)는“UN이 추진한 사업 가운데 여성의 동등권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운동보다 폭넓고 열렬한 지지를 불러일으킨 사업은 거의 없었다.”라고 피력한 바 있고, 역사적으로 여성연대의 열정과 힘은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기여한 경우가 많았다.
코로나19의 확산이 진정되지 않고 있는 2021년 현재, 고용불안과 노동조건 악화 문제는 남녀 모두에게 가혹한 현실이지만 저임금, 비정규직, 소규모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가혹하다. 대면 접촉을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 현실은 조직화의 어려움 또한 가중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 여성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으로 여러 엄혹한 상황을 헤쳐 온 것처럼 결국 연대의 힘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이 남성과 동등한 빵과 장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113년 전에 ‘빵과 장미를 달라’던 여성들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