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진 사람들에게 확실한 소득 보장을 할 수 있는 방도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최근 ‘전국민고용보험’과 함께 소득 보장의 방식으로 기본소득이 가능하고 적절한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 더 정확하게 말해 시장 노동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는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이 이런 기본소득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는 훨씬 더 깊고 긴 전망을 필요로 한다.
공유의 권리는 자연자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 먼저 두 가지를 말해보자. 도대체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원천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본소득은 오늘날의 노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원형적 기본소득을 제시한 토머스 페인은 이중 소유권에 기초하여 (자신의 노력에 기초한)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 한편 여전히 모두에게 남아 있는 공유의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기 노동을 통해 어떤 토지를 개간해서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지만, 그 바탕에는 모두의 것인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10퍼센트의 상속세로 이 부분을 거두어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유의 권리는 자연자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최근에 일부 네그리와 하트 같은 일부 정치철학자들이 사회적 생산을 주장해서 주목받긴 했지만, 사실 모든 생산은 언제나 사회적 생산이었다. 다시 말해 어떤 개인의 노동과 노력에 의해 성취도 지식과 정보를 비롯한 인류와 사회의 공통 유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은 모든 소득의 90퍼센트가 이전 세대에 의해 축적된 지식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원천을 원천적 공유와 사회적 생산에 의해 형성된 부, 즉 공유부에서 찾는다는 것은 기본소득이 소득 보장을 넘어서서 현대 사회의 소유권을 문제시한다는 것을 말한다. 18세기 말의 토머스 페인에게는 공유와 관습적 권리를 무시하고 현대적 소유권을 확립한 인클로저가 문제였으며, 20세기 후반의 허버트 사이먼에게는 현대의 사회적, 결합적 생산의 산물을 일부가 거의 독차지하는 게 문제였다.
물론 자본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이용]를 통해서도 축적을 해간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산업 사회가 탄생했고, 이 속에서 인류의 일부가 ‘기아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풍요를 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자본의 축적과 산업 사회의 발전은 매우 불규칙하고 단속적인 과정이었고, 이는 주기적인 경기 변동, 사회적 불평등, ‘실업의 공포’로 나타났다. 대공황, 파시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런 공포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복지국가로 등장한다.
복지국가는 사회적 불평등과 실업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파이를 키운다’는 말로 요약되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 이 속에 1950년대와 60년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이자 완전고용의 시대였다. (완전고용이 사실은 모두가 아니라 남성 생계부양자만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겠다. 이는 여성이 차별받았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지불받지 못한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노동하는 다수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비록 인류의 일부이긴 하지만 복지국가에서 경제 성장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한 시장 노동 이외의 소득은 제한된 의미만을 지녔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여러 가지 변화는 기본소득의 필요성 그리고 정당성을 사고하도록 했다. 흔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노동의 유연화를 통한 초과 착취, 금융화와 민영화를 통한 수탈, 지적 재산권의 설정을 통한 강탈 등이 이 시기에 확산되었다. 오늘날에는 여기에 더해 디지털/ 플랫폼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데이터의 전유를 통한 부의 축적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는 인간 집단과 인간 활동은 이런 맥락 속에서 격하되고, 불안정해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 노동은 소득을 얻는, 혹은 소득을 얻으려 하는 수단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너무나 나뉘어 있어, 과거 산업 자본주의 시대처럼 하나의 노동을 말하기 어렵다. 부문, 지역, 업종, 노동 형태, 노동 조건, 사회적 지위 등등 여러 요소에서 단일한 노동은 없으며 ‘노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말해야 할 것은 오늘날 노동이 기대고 있거나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서이다. 노동조합운동은 오랫동안 노동 조건의 개선 그리고 자본의 지배에 맞서는 투쟁을 통해 사회 진보와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해왔다. 지금도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점점 노동이 분할되고, 노동하는 다수가 불안정해지고 있으며, 좋은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의 일부가 자신의 지위, 즉 완전고용 시대에 누렸다고 생각되는 지위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 노동을 지탱해 온 이데올로기 및 정서의 퇴조와 맞물려 있다. 사회주의건 사회민주주의건 과거 노동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조건의 개선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 질서를 바꾸는 것을 최소한 암묵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는 사회 연대의 정서에 기반했고 또 이러한 정서를 고무했다. 하지만 노동의 분할과 차별은 동질성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 자체를 무의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소득과 지위는 높으나 인류와 사회에 해가 되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점점 적어지는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사회 자체를 분할시킬 정도에 이르렀다.
기본소득은 노동의 힘을 강화시킨다
이런 상황에 처한 노동은 기본소득에 대해 우선 두 가지 쟁점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부와 소득은 노동의 산물인데,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것은 부당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격하 및 노동 조건의 악화에 맞서 노동의 권리를 지키고, 노동의 지위를 향상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지 않는가라는 주장이 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 노동에 의해 형성된 부와 소득 자체가 사실은 모두의 것인 자연 자원과 사회 자원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누구의 것이라 특정할 수 없고,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분배할 때만 정당하다고 답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주어지고, 함께 형성한 부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과 관련해서 기본소득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주어 노동의 힘을 강화할 수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시장 노동 이외에 개인에게 혹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노동 소득 아래에 소득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이 충분히 높은 금액일 경우 이를 발판으로 삼아 시장 노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해방적일 수 있다.
#기본소득 #찬성 #안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