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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평양, 당조직이 공장을 접수하다

등록일 2019년09월04일 14시38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글로벌노조 컨설턴트

 

▲ 1958년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가1956년 4월 23일~29일 평양에서 열렸다. 116만4,945명의 당원들을 대표하여 결의권을 가진 대표 914명이 참가했다. 대회는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끝내고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기초를 튼튼히 닦으며 인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제1차 5개년(1957~1961) 계획의 기본과업으로 제시하고 인민경제 부문별 발전방향과 과업들을 확정”하였다. 새 규약을 채택한 당대회는 근로단체 사업에 대한 당 조직들의 지도를 더욱 강화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그해 12월 11일~13일 조선로동당은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었다. 5개년 계획의 첫해인 1957년 인민경제 계획과 그 수행 방도를 토의하면서 김일성은 “증산하고 절약하여 5개년 계획을 기한 전에 넘쳐 완수하자”고 독려했다. 이 회의를 계기로 천리마운동이 일어났다. 천리마운동의 본질은 “모든 근로자들을 교양개조하여 당과 수령의 두리에 더욱 굳게 묶어 세우며 그들의 혁명적 열의와 창조적 재능을 높이 발양시켜 사회주의를 더 잘, 더 빨리 건설한다”는 데 있었다. 


1958년 8월 조선로동당은 농업협동화가 승리적으로 완수되었다고 선언했다.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도 농업협동화의 완성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마무리했다. 이를 두고 조선로동당은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성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이 전면적으로 승리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선진적인 우리식 사회주의제도가 튼튼히 서게 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압박이 종국적으로 청산되고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 자주성이 실현되었으며 계급해방의 력사적 위업이 빛나게 완수되었다”고 평가했다. 


1958년 2월과 3월 김일성은 생산기업소 당조직원 및 당위원장들, 도시군당 위원장들, 인민위원회 위원장들 앞에서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혁명 투쟁과 건설사업에 힘 있게 불러일으키는 것”과 “각급 당위원회들이 해당 단위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옳게 수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조선로동당이 국가를 넘어 공장과 농장 등 생산현장까지 관리하는 “최고지도기관”로 자리 잡아야 함을 설파한 것이다. 이를 통해 생산현장에서 “당의 유일적이며 통일적인 령도가 철저히 보장될 수 있으며 당의 로선과 정책이 어김없이 관철될 수 있는” 사회 체제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생산현장이라는 노동자들의 물리적 공간을 장악한 당은 노동자들의 정신적 공간인 사상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58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10돌 기념 경축대회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면 착취의 근원을 없애버리고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물질 기술적 토대도 튼튼히 닦아야 하며 사람들의 의식도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주의가 완전히 건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면서 사상혁명을 일으켜 노동자들을 “교양개조”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로동당은 “사회주의 건설의 대고조를 더욱 높이고 천리마운동을 발전시켜 혁명과 건설을 계속 힘 있게 다그치기 위한 투쟁에로”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을 넘어 정신적 수단까지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북한의 노동자단체인 직업동맹이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에서 당의 통제를 받는 국가기관으로 변화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1958년 조선로동당은 북한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적 사상적 장악을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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