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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철폐의 횃불을 밝힌 최제우

등록일 2019년07월23일 11시02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윤효원 인더스트리올 글로벌노조 컨설턴트

 

한국 노동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사상과 이념의 기원을 찾는다면 그 중심에 동학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학은 1860년 5월 25일 수운 최제우(1824~1864)에 의해 경주 용담에서 창시되었다. 몰락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난 최제우는 31세에 구도에 들어가 6년 만인 1860년 도를 깨닫게 되었고, 이를 1862년부터 동학이라 불렀다. 


최제우는 1861년 여름부터 동학을 널리 알리는 활동(포덕)에 나섰고, 활동 2년 반 만인 1863년 12월 조선왕조는 이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탄압을 가했으며, 결국 1864년 4월 15일 대구에서 최제우는 만 40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다. 유대인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역사적 예수와 똑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고 활동에 나선 때는 조선 전역에 민란이 끊이지 않고, 중국에선 태평천국(1852~1864)이 수립되어 청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고, 미국에선 남북전쟁(1861~1865)이 벌어져 골육상잔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대란과 격변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여느 종교와 달리 영혼설이나 내세를 부정하며 현세의 개벽을 목적으로 했다. 유교를 공부한 선비답게 최제우는 살아갈 방도와 학문으로 동학을 고민했다.  “바로 알고 배워 몸에 익히고 실천하는” 도학(道學)으로 동학을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동학의 신은 저 멀리 하늘 너머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의 몸 안에 있으면서 인간의 시공간에 밀착해 있다. 이러한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신과 인간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귀족과 천민이라는 수직적 사회관을 깨뜨렸다. 신은 초월적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보고 듣는 감성적 존재이며, 우리 모두에게 평등하게 임재한 존재인 것이다. 


수운 최제우의 뒤를 이은 해월 최시형은 1865년 10월 “우리 도인들은 일체로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스승님의 본뜻에 따르도록 하라”고 선언하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동학은 개인의 구원이 아닌 공동체의 해방을 지향하면서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아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 이념으로 나아갔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신분제를 타파하고 외세 침략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나아간 것은 동학 이념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후 30년 동안 세를 불린 동학은 1894년 양반 지배계급과 일본군에 맞서는 항쟁의 주력이 되었고, 결국 일본군과 조선왕조군의 연합 작전으로 처참하게 분쇄되었다. 하지만 동학은 민족사에 살아남아 21세기 들어서도 차별 철폐를 통한 신분제의 타파와 나라를 보듬고 민중을 편케 하라는 보국안민의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면서 한국 노동운동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

윤효원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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