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한국노총 정책본부 차장
“52시간이라고요? 한국도 선진국인데 그렇게 많이 일한다니요.”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올여름 우리나라를 찾아 다른 곳도 아닌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가진 특별대담에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 말이다. 어느 외국인 교수가 바라본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한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른바 ‘1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된 지 이제 고작 4개월이 흘렀다. 1주 52시간 상한제라는 것도 사실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아니라, 그동안 잘못 운영된 노동시간 규제를 정상화한 조치였을 뿐이다. 52시간이라는 숫자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에도, 지금 이마저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자가 ‘시간 주권’ 찾아야 한다
지난 2월 28일 국회에서 노동시간을 1주 최대 52시간으로 제한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부칙 제3조에 “고용노동부장관은 2022년 12월 31일까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 확대 등 제도개선을 위한 방안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 한 줄의 부칙조항이 훗날 노사관계에 있어서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지 고작 4개월 만에 이렇게 노동현안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자본의 극렬한 저항에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현 정부의 노동정책 기조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당장 경영계는 현재 탄력적 근로시간제 완화뿐만 아니라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 확대까지 요구하는 등 대정부 압박수위를 점점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 역시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를 기정사실화한 채 현재 제도도입에 따른 노동자 건강권 침해와 임금감소 오·남용을 방지할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과연 우리가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노동시간 단축’을 통하여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동시간은 대부분 사람들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누군가의 노동시간은 그 개인과 가족의 삶의 모습을 규정하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규정하는 기본 틀거리이다. 이처럼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시간은 노동조건 중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노동시간에 대한 투쟁은 자본주의 발전 역사의 중심에 있어 왔다. 또한 ‘노동시간은 노동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노동시간이 노사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지대하며, 노동법 탄생 이후 노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흐름과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종전 우리나라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억압적 노동체제’, 다시 말해 ‘고질적인 장시간-저임금 노동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것을 중심으로 흘러왔다. 반면,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변형근로제의 도입과 같은 이른바 ‘유연노동체제’는 노동시간 유연화와 고용유연화 등을 관철시킴으로써 ‘장시간-저임금 노동체제’보다 착취를 고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 기업에서 빈번히 활용되는 근무형태 변경은 물론이고, 연장무휴가동, 생산성 향상, 비정규직의 시간제 고용, 노동시간관리제, 집중근무시간제, 차등 휴게시간제, 노동시간저축휴가제, 시차출퇴근제, 재량노동시간제, 재택근무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 노동자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저녁이 있는 삶’의 보장을 위해서는 ‘장시간-저임금 노동체제’ 그리고 ‘유연노동체제’가 강요하는 시간 빈곤의 구조를 무너뜨려 ‘시간주권’, 즉 내 삶의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 토대 위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당연히 우리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 ‘일과 생활의 균형’에 복무해야 하며, ‘좋은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설계
A선풍기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이○○씨의 회사는 단위기간 6개월의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운영하고 있다. 여름철을 앞두고 일이 몰리는 5~7월에는 한 주 52시간씩(연장노동 12시간 포함 시 64시간) 일하고, 일감이 줄어드는 8~10월에는 한 주 28시간만 근무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씨는 똑같이 시급 1만원을 받으면서 비슷한 스케줄로 일하는 B선풍기 공장 김○○씨보다 6개월 치 급여가 70만~80만 원 가량 적다. B공장은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돈만 덜 받는 것이 아니다. 일이 몰릴 때 이○○씨는 하루 24시간 연속 노동을 지시받기도 한다. 과로 탓에 병을 달고 사는 이○○씨는 회사 게시판에서 ‘내년부터는 3개월간 휴일 없이 매일 근무를 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공지를 보고 퇴사를 고민 중이다. |
위의 사례는 근래 논란의 중심에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이 6개월로 연장된 상황을 가정한 가상사례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단위기간 동안 업무량에 맞게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제도로서, 특정한 날에 집중적으로 초과노동을 시키더라도 일정기간 동안 평균 노동시간이 기준을 초과하지 않으면 연장노동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도록 기업의 부담을 없애주는 제도이다. 즉,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필요·욕구·선택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적 수요·업무량 등 자본의 필요에 의해 설계되는 제도인 것이다. 때문에 아무런 보완대책 없이 단위기간이 늘어나게 될 경우 노동자 입장에서는 실질임금 감소, 장시간노동에 의한 과로 유발 등 부작용이 상당할 수 있다.
한국노총이 자체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확대하면 약 7%의 실질임금 감소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이 3개월, 6개월, 1년으로 확대될 경우 임금감소분을 분석한 결과이다.
1) 3개월(13주) 단위
- 현행법에서 인정하는 최대기간으로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6.5주는 52시간, 나머지 6.5주는 28시간 근로함.
-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40시간이 되고 전체 노동시간은 520시간이 됨.
- 시급 1만원일 경우 520만원 지급하면 됨.
- 탄력근로제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52시간 근로한 주는 12시간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이 발생하여 58시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함.
- 따라서 6.5주는 각 58시간, 나머지 6.5주는 각 28시간 임금이 발생하여 총 559시간의 임금이 발생함.
- 탄력근로제 도입전후 임금 차는 39시간(559-520)의 임금이며 시급1만원일 경우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39만원(7%)의 임금이 감소됨.
2) 6개월(26주) 단위
- 13주는 52시간 나머지 13주는 28시간 근로함.
-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40시간이 되고 전체 노동시간은 1,040시간이 됨.
- 시급 1만원일 경우 1,040만원 지급하면 됨.
- 탄력근로제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52시간 근로한 주는 12시간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이 발생하여 58시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함.
- 따라서 13주는 각 58시간, 나머지 13주는 각 28시간 임금이 발생하여 총 1,118시간의 임금이 발생함.
- 탄력근로제 도입전후 임금차는 78시간(1,118-1,040)의 임금이며 시급 1만원일 경우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78만원(7%)의 임금이 감소됨.
3) 12개월(52주) 단위
- 26주는 52시간 나머지 26주는 28시간 근로함.
-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40시간이 되고 전체 노동시간은 2,080시간이 됨.
- 시급 1만원일 경우 2,080만원 지급하면 됨.
- 탄력근로제가 도입되지 않았다면 52시간 근로한 주는 12시간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이 발생하여 58시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함.
- 따라서 26주는 각 58시간, 나머지 26주는 각 28시간 임금이 발생하여 총 2,236시간의 임금이 발생함.
- 탄력근로제 도입 전후 임금차는 156시간(2,236-2,080)의 임금이며 시급 1만원일 경우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156만원(7%)의 임금이 감소됨.
4) 3개월(13주)에서 12개월(52주)로 늘어날 경우
- 현행법에 따라 3개월 단위로 도입하는 기업에서 12개월로 탄력근로제를 확대하면 117시간의 임금인 117만원(156-39)의 임금손실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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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정리하면, 현행 근로기준법상 한 주 4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통상임금의 150% 연장노동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하면 주 52시간까지는 연장노동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즉, 한 주 최대 12시간 연장노동수당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단위기간이 길어지면 손실도 커진다. 시급 1만 원 노동자가 3개월 단위 탄력적 근로를 했을 때 연장노동수당을 받지 못한 손실액이 최대 39만 원(5,000원×12시간×1.5개월)이지만, 단위기간이 6개월, 1년으로 확대되면 손실액이 각각 78만 원, 156만 원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근로기준법에서 사용자에게 임금보전방안을 강구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이에 대한 처벌규정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보전방법·절차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는 유명무실한 규정에 불과하여, 현실적으로 임금감소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고 봐야 한다.
현재도 주 80시간 노동 가능한 구조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더 큰 문제점은 과로사 유발 등 노동자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것이다. 현행 법령상 3개월 단위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시행할 경우, 특정한 주의 노동시간은 64시간까지 가능하다. 특히, 300인 미만 사업장은 1주 52시간 상한제가 2020년 1월 1일 이후 시행되므로 휴일노동시간 16시간을 포함하여 무려 80시간까지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이 현행 근로기준법의 규정만으로도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시행하게 되면 장시간노동이 불가피한 상황인데, 단위기간이 확대될 경우 가뜩이나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게 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장시간 야간노동은 국제암연구기구(IARC)가 납이나 자외선과 같은 ‘2급 발암물질’로 분류할 만큼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요인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이 확대될 경우 최장시기 장시간 야간노동이 무분별하게 허용되어 이중 삼중의 노동강도에 신음하게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재 정부의 ‘과로사’ 판단기준은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주당 평균 60시간을 초과했을 경우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현행 3개월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의하더라도 1주 64시간까지 초과노동이 가능하게 되는 바, 이는 정부 스스로 과로사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의 확대는 사용자가 노동자 개인의 생활주기를 결정하는 등으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일상생활까지 파괴시켜, 결국 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 증가와 정서적 안정을 현저히 훼손시킬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현행 탄력적 근로시간제 자체로도 1주 최대 80시간이라는 초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반면 현행 근로기준법상으로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시행에 따른 연속적 연장노동 및 노동강도 강화 등 노동조건 악화 우려를 불식시킬만한 제도적 장치가 전무한 상황이다. 11시간 연속휴식권 보장, 일(日)·주(週)·월(月)·년(年) 단위 노동시간 상한선 설정, 임금보전방법 등의 제도적 보완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공짜노동으로 대표되는 ‘포괄임금제의 폐지’, 5개 특례유지업종 폐지, 5인 미만 사업장 등 법정노동시간 적용 확대에 대한 문제가 선결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정부는 당초 노동시간 단축정책을 추진하면서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 일자리나누기, 산업재해 감소 등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제도이다. 더욱이 단위기간 확대는 그야말로 노동자들에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문제이고, 노동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언론에서 노동시간 유연화의 모범으로 독일의 사례를 자주 소개하는데, 독일은 1995년에 이미 산업 전체 평균 주38.5시간, 금속·철강·전기산업의 경우 주 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했다. 독일과 같이 연간 노동시간이 1,300~1,700시간대인 선진국과 매년 장시간 노동국가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는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되레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장시간노동의 탈피를 전제로 하므로 탄력적 근로시간제 논의는 OECD 평균 노동시간인 1,700시간대에 진입하는 시점에 논의해야 하며, 백보 양보하더라도 노동시간 단축이 5인 이상 사업장에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2022년 이후 현장의 부작용 등을 점검·검토한 후 논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