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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백승화 안랩노동조합 위원장

“노조 설립 일주일 만에 회사 분사방침 철회 … ‘노조 효과’ 정말 확실하네요”

등록일 2018년10월15일 10시45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안랩에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출퇴근 시간과 휴일 그리고 밤이 그것입니다. 하루종일 열려 있는 네트워크 보안에 정해진 시간이 없기 때문이죠 (…중략…)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컴퓨터를 이용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가 없는 안랩의 24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이름 ‘안랩’입니다.”

 

2012년 출간된 아동용 만화 「V3특공대 1화. 안 박사와 V3특공대」에 등장하는 ‘안랩’ 소개 문구다. ‘V3특공대’라는 표현에서 컴퓨터 보안업계 선두 업체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반면 출퇴근 시간과 휴일과 밤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아니 그럼 근로기준법은?’이라는 의문이 뇌리를 스친다. 정보·기술(IT) 업계의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 실태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수당 없는 야근’의 상징 ‘포괄임금제’도 떠오른다.

 

과연 그 실상이 어떤 지 현실 속 V3특공대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하자. <주간 노동N이슈>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백승화(46·사진) 안랩노조 위원장을 만났다.

 

 

분사방침 발표에서 노조설립까지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 V3와 함께 이제는 정치인으로 변한 벤처신화의 상징 안철수 의원이 창업한 회사로 더 유명한 보안 소프트웨어업체 안랩에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1995년 창사 이래 처음이다. 안랩노조는 이달 1일 고용노동부에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한 뒤 한국노총에 가입했다. 정식으로 노조가 만들어진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체 직원 1천여명 중 250여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직원 4명 중 1명 꼴이다.


안랩노조 결성의 일등공신은 회사측이다. 최근 회사가 보안서비스 관련 사업부를 분사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해당 직원들의 의견을 전혀 수렴하지 않은 것이 노조 결성을 촉발했다.
 

지난달 14일 안랩 이사회는 솔루션서비스·보안관제·컬설팅팀이 포함된 서비스사업본부를 분리해 ‘안랩BSP'라는 별도 법인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안랩 직원 356명의 소속이 자회사로 바뀌는 것이다. 회사측은 이날 기업분할 공시를 통해 △서비스사업부문 특성에 적합한 경영환경과 지배구조 확립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통한 전문성 강화·효율성 제고 △사업경쟁력 강화 통한 집중투자 촉진 등을 분사 이유로 밝혔다. 11월2일 주주총회를 열어 이를 최종 확정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분사 소식을 접한 직원들은 크게 동요했다. 난데없는 구조조정 날벼락 앞에 수습책이 보이지 않았다. 추석 연휴를 일주일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11월2일 주총에서 분사가 최종 확정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니까…. 지금 당장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죠.”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지난달 27일 6명의 직원이 모처에 모였다. 노동조합 결성을 모의하는 자리였다. 이날 백승화 부장은 유독 말이 없었다. 노조라고 하면 빨간 머리띠 매고 투쟁구호 외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의 일상에 노조가 끼어들 거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조합원으로 가입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은 제가 책임감을 갖고 움직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위에서 ‘백승화 부장이 노조를 한다고 하면 그럴만 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요.”
 

노조 결성을 위한 최초의 회합으로부터 이틀 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6인이 다시 모였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노동조합 설립총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백승화 부장이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인 이달 1일 노동조합 설립신고가 이뤄졌다. 회사가 분사 방침을 내놓은 지 불과 17일 만의 일이다.

 


IT업계에 분 노조 바람 … 장시간노동·포괄임금제 화두로

 

 

안랩노조의 경우 회사의 분사결정이라는 돌발변수가 노조 설립의 촉매제 역할을 했지만, 정보기술(IT)·게임업계에는 이미 노조 결성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던 터였다. 지난 4월 국내 최대 인터넷 기업 네이버에 노조가 등장한 데 이어 9월에는 넥슨과 스마일게이트 같은 대형게임업체에 잇따라 노조가 설립됐다. 여기에 안랩노조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노동조합 무풍지대에 노조 설립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들 업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상화된 초과근로와 ‘수당 없는 야근’을 강제하는 ‘포괄임금제’가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작되고, 사회적으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 일과 생활의 균형)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IT업계의 노조 결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랩 역시 장시간노동 문제에 있어 자유롭지 않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뒤 안랩에는 이를 초과해 근무하는 노동자가 단 1명도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물론 보고서 상에서만 그렇다는 얘기다.
 

“제가 속한 서비스사업본부의 경우 고객사에 파견돼 근무하는 형태입니다. 저희 팀만 해도 성남시 야탑동에 있는 대법원 전산센터로 출퇴근하는데요.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도록 돼 있지만, 프로젝트에 따라 야근이나 심지어 주말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납기일이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회사에는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못합니다. 늘 52시간 미만 근무한 것으로 보고를 올려야 해요. 회사에서 무조건 52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런 기록이 남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포괄임금제에 대한 불만을 지닌 직원들도 적지 않다. 포괄임금제는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노사가 임의로 약정한 고정수당을 임금에 포함시켜 지급하는 방식이다. 영업이나 운송·경비 등 외근이 많고 노동시간 측정이 어려운 업종에서 시작됐지만 IT업종이나 사무·전문직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포괄임금제는 법에 정해진 개념이 아니라 판례로 인정돼 온 관행이다. 법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근로감독의 손이 미치지 않는다.
 

안랩은 창사 이래 줄곧 포괄임금 형태의 연봉제를 고수해 왔다. 직원들은 매년 초 회사와 개별 연봉계약을 맺는다.
 

“제가 안랩에 입사하기 전 엘지전자 계열 SI(시스템통합) 업체에 다녔었는데요. 거기선 초과수당을 하면 수당을 줬어요. 그런데 안랩엔 그게 없더라고요. 수당 지급을 요구해봤지만 번번이 반려됐어요, 연봉에 이미 포함돼 지급되고 있다는 거죠.”
 

장시간노동과 포괄임금제 문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안랩노조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 가운데 하나다. 앞서 설립된 IT업계 노조들 역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일한만큼 보상하라는 것이다.

 

 

노조 효과

 

 

“노조가 생기니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노동자가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안랩노조 설립 일주일 만인 이달 8일. IT업계 종사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 같은 내용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회사가 분사방침을 철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설립신고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터져 나온 승전보였다. 안랩노조 조합원들로 구성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은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다. 백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며 울먹이는 직원도 있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안랩은 분사결정을 통보하는 방식도 일방적이었지만 이를 철회하는 방식도 일방적이었다.
 

“대표이사가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분사 철회결정을 알렸습니다. 요컨대 회사 발전을 위해 분사를 결정했지만, 직원과의 소통 부족으로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이라면 일단은 추진계획을 접겠다는 내용이었어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재추진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거죠.”
 

분사방침과 철회결정이 어느 선에서 결정됐는가 하는 점도 되새겨 볼 대목이다.
 

“저 역시 창립자인 안철수 의원의 인재경영 철학이 마음에 들어 안랩으로 이직한 사람인데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실망이 컸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이번 일이 정리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경영에서 손을 뗐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주주잖아요. 직원만 350명, 그 가족까지 하면 1천명이 넘는 사람의 생존이 달린 문제를 이렇게밖에 처리할 수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안 의원을 향하자 회사가 총대를 메고 성급하게 상황을 봉합한 것 아니냐는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벤처신화의 상징 안철수 의원이 창업한 회사로 더 유명한 보안 소프트웨어업체 안랩에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사진은 아동용 만화 「V3특공대 1화. 안 박사와 V3특공대」표지.

 

 

노조설립 일주일 만에 날아든 승전보

 

 

어찌됐든 분사 추진과 철회의 해프닝을 겪으며 안랩에 노조가 만들어졌고, 한국노총으로서는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노조를 회원조합으로 맞이하게 됐다. 주요 연령대가 20대 후반에 집중돼 있고,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소통에 익숙하며, 기성세대가 주축인 노조에 대해 호기심과 혐오감 을 동시에 표출하는 젊은 세대다. 노동계 특유의 ‘아재 코드’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올드하고 권위적인 이미지가 강한 한국노총으로서는 새로운 조직화, 새로운 조직문화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기회로 삼을 만 하다. 청년노동자 노조조직화를 위한 고민의 연장선에서 이번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안랩노조는 회사를 상대로 임금·단체협상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현재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밟고 있다. 노조는 안정적인 노조활동을 위한 토대를 닦는 작업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현재는 연차를 소진하면서 노조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일단은 타임오프나 노조사무실부터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조합원들을 만날 시간과 공간이 절실하더라고요.”
 

단체협약 요구안 마련을 위한 의견접수도 시작했다. SNS 등을 활용한 실시간 소통이야말로 안랩노조의 강점이다.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아우르는 설문조사도 준비 중이다. 노조 홍보활동도 적극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성남 판교에 위치한 안랩 본사 주변에 노조를 알리는 현수막을 설치하고, 출근시간대에 맞춰 노조 홍보 리플릿을 배포할 예정이다.
 

“지난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한국노총 간부들이 이끌어주는 대로 따라오다가 좋은 성과를 냈어요. 회사가 단 3주 만에 분사결정을 철회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노조 효과’ 정말 확실하네요. 저희를 위해 애써 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백 동지’는 아직 어색해”

 

 

“당신 무슨 일 있어요?


지난달 27일. 노조결성을 위한 첫 모임을 다녀 온 뒤 얼굴색이 어두운 백 부장에게 아내가 물었다.
 

“노조를 만들어야 될 것 같아. 거기서 위원장을 맡을 것 같은데….”
 

 그는 이미 ‘최악의 경우 이 바닥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던 차였다. ‘지방이라도 내려가 프로젝트 받으며 일하면 가족들 밥이야 굶기겠어?’ 하는 생각도 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시대에, 법으로 보장된 노조를 한다는 것이, ‘노알못’ 백 부장에게는 이토록 비장한 일이었다.
 

“그동안 저는 회사가 부당한 결정을 해도 대항하지 못하는 개인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노조를 만들면서, 우리 모두가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 회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노조를 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높은 분들한테 찍혀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노조야말로 노동자들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플랫폼인 것 같아요.”
 

같은 일터에서 근무하는 동료들, 그리고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조라는 플랫폼에 안착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싶다는 백 위원장.

 

“백 동지, 앞으로 잘해 봅시다”라는 한국노총 임원들의 인사가 어색해 몸 둘 바 모르겠다는 그이지만, 보안전사 V3특공대와 함께라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노조’를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백 위원장과 안랩노조의 또 다른 승전보를 기다려 보기로 하자.<끝>

구은회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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