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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칸(2022)

열차와 당신과 나

등록일 2023년04월04일 08시04분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대지 위를 끝없이 달리는 기차에서 생면부지의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난다. 게다가 이들이 머무는 곳은 좁은 2인용 객실 칸이다. 원래 여행지에서 사랑의 불꽃은 더 쉽게, 더 강렬하게 튀는 법이니, 어쩌면 둘은 지금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에 최적의 조건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해 시간적 배경이 1990년대라면 어떨까? 지금처럼 핸드폰에 얼굴을 파묻는 대신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들거나, 곁의 누군가와 말을 섞으며 심심함을 달래야만 할 것이다. 언뜻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이 모든 설정을 갖춘 영화 <6번 칸>(2022)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다.

 

3월 초 개봉한 이 작품은 권투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2021)로 장편 데뷔를 치른 핀란드 출신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열차에 몸을 실은 주인공은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지내고 있는 핀란드인 라우라(세이디 하를라).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열차에서 라우라와 같은 칸을 쓰게 된 남자는 러시아의 광산 노동자 료하(유리 보리소프)다. 이들의 예기치 않은 동행은 한눈에 로맨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보는 이의 마음 어딘가를 슬며시 건드려 쉽게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출처=다음영화

 

 

라우라와 료하를 싣고 달리는 열차는 모스크바를 출발해 러시아 북서부의 항구도시 무르만스크로 향한다. 그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자보츠크 등의 도시를 지날 때면 기차는 길게는 하룻밤 짧게는 한 시간 남짓 멈춰 선다. 탑승자들은 잠시 내려 땅을 밟기도 하고 객실에서 그대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무르만스크에 당도할 때까지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다. 열차란 본디 각자의 사연을 싣고 달리는 것으로, 이 무르만스크 행 열차에도 가지런히 정돈되지 않는 너무나 많은 사정과 까닭이 있을 것이다.

 

라우라의 사연은 이렇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며 교수와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여성인 탓에 그들의 사랑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둘은 서로를 아끼는 듯하다. 애초 무르만스크에는 두 사람이 함께 가기로 했다. 그곳에 있는 만 년 넘은 암각화를 보기 위해서다. 영화는 라우라의 연인 이리나(디나라 드루카로바)의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교수의 지적인 친구들이 아파트를 가득 채우고 파티 중인데, 라우라는 그들 사이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하는 듯 보인다. 곧이어 이리나는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같이 가는 여행은 취소됐다. 라우라는 혼자서라도 암각화를 보러 갈 계획이다. 그러니까 6번 칸은 원래 라우라가 연인과 함께 쓰기로 했던 객실인 셈이다.

 

료하는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동행 상대는 되지 못한다. 열차에 탑승하자마자 술병을 꺼내드는 그는 주정을 부리며 라우라에게 시비를 건다. “우리나라는 강력해. 나치도 물리쳤고 달에도 갔다고”라며 주절대더니 핀란드에서 왔다는 라우라에게 ‘안녕’이 핀란드어로 뭔지, ‘사랑해’는 또 뭔지 묻는다. 위협적이고 불쾌한 대상처럼 보이지만 무르만스크에 일하러 간다는 그는 한편으로 유악한 청년 같은 얼굴도 하고 있다. 라우라와 료하의 마주침은 금세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라우라가 료하를 견디지 못하고 열차에서 내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서 통화한 연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라우라는 다시 열차에 오른다. 그렇게 이들의 기묘한 동행은 자꾸만 이어져간다.

 

△출처=다음영화

 

 

“친구 아니에요. 같은 칸을 쓰고 있을 뿐이죠.” 둘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표현은 ‘나와 같은 칸을 쓰는 사람’일 거다. 그런데 여행의 마법 때문인지 영영 가까워질 일 없을 듯한 둘에게도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기회가 종종 찾아온다. 처음엔 물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식당 칸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을 정도의 간격,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목소리로만 소통할 정도의 거리. 술에 취하지 않은 료하는 말이 잘 통하진 않아도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을 상대다. 하룻밤 정차하는 페트로자보츠크에서 그는 나이든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라우라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거절하고 공중전화에 매달려있는 라우라는 한눈에 봐도 슬픔에 젖은 모습이다. 연인은 이제 전화를 받지 조차 않는다. 애써 괜찮은 척 하는 라우라를 데리고 시골집으로 향하는 료하. 아마도 그의 가족인 듯한 나이든 여인이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한다. “여자는 영리한 동물이야. 남들 얘기 들을 필요 없어. 내면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지혜로운 할머니는 자기 안의 기준을 따르며 자기를 믿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건 지금 라우라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다.

 

6번 칸의 두 남녀는 외로움을 가득 끌어안은 사람들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고 또 어딘가에서 상냥히 맞아들여지길 원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그것이 너무 큰 바람인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이들의 상태를 힘주어 강조하거나 대놓고 설명하진 않지만, 인물의 서글픈 눈과 고집스런 입, 사소한 몸짓들이 그러한 고독을 무엇보다 잘 표현한다. 숙취 가득한 채로 다시 열차에 오른 라우라는 러시아어를 하지 못해 곤란해 하는 어느 핀란드 청년에게 객실을 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여행길에서 얻은 무심한 우정의 시간이 지나간 뒤, 그러나 라우라는 그 청년이 자기 캠코더를 훔쳐갔다는 걸 알게 된다. 돌이켜보면 라우라는 항상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그 캠코더엔 열차에서 보이는 설원의 풍경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추억이 들어있다. 연인의 아파트, 그 아파트에서 열린 파티, 파티의 사람들. 저장하고 싶고 스스로 그 일부가 되고 싶은 기억들은 이제 사라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을 잃고 나자 라우라는 조금 홀가분해 보인다. 이제 라우라는 자기 안의 기준을 찾을 수 있을까.

 

△출처=다음영화

 

 

끊이지 않는 소음, 씻지 못해 기름진 머리, 어둡고 칙칙한 날씨,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숙취. <6번 칸>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여행의 낭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어딘가로 가기 위해 떠나는 길 위에서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얻는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을, 버리는 만큼 끌어안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려준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우라와 료하는 점차 가까워진다. 둘 사이에 오가는 감정을 간단히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관계의 지속을 담보하거나 내밀한 접촉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 달리 볼 여지도 있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함께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외로움을 보존한 채로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있을 수 있는 관계,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둘 사이에 성립하는 건 바로 그런 관계다. 마침내 암각화 위에 선 둘을 감싸는 매서운 눈보라와 거센 파도는 우리가 태생적으로 그처럼 외롭고 동시에 독립적인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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