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년간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인내와 희생을 발판으로 세계경제규모 13위에 달할 정도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국가이다. 그러나 밝은 빛 뒤에 반드시 생기는 그림자인 것일까. 한국전쟁이라는 아픈 상처를 딛고도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유일한 국가인 우리나라는 동시에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을 자랑하고 있다. 노후 소득이 공적으로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적연금을 보다 강화시켜 우리의 미래를 보다 밝게 해야 할 필요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 1월 26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이하 연금특위)에 공적연금강화방안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요구안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보자.
연금특위는 정말 연금개혁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한국노총은 먼저 연금특위의 논의절차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연금개혁은 전 국민의 이해가 얽혀있어 실현가능성과 사회적 수용성이 매우 높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련의 사실들이 충분히 검토되고 선택가능한 대안이 적절히 논의될 수 있는 일종의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한국노총은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표성 있는 이해단체의 적극적인 참여와 일반국민들의 충분한 논의과정을 통해 우리사회가 실제 수용할 수 있는 개혁안이 만들어져야 연금개혁이 비로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특위는 여론수렴 절차로서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민간자문위원회, 연금을 둘러싼 이해관계단체의 대표들을 통한 의견수렴, 일반 국민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공론화기구 등을 통해 3월까지 논의를 이어 나갈 것이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말뿐인 계획이었다. 형식상 절차만 만들어놨을 뿐 실질적인 과정 관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네 차례 전체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각 단계별 참여 인원수 정도만 정리해두고, 구체적 방식이라든가 관련 예산확보 등에 대해서는 일절 논의한 바 없었다. 회의자료의 공개적 배포, 언론설명회 등은 전혀 없었다.
한국노총이 우려한 대로 연금특위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가 계속 노출되고 있다. 특위는 7월 구성 이후 사실상 첫 회의를 10월 25일에 시작하면서 아까운 세 달을 허비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민간자문위원회는 개혁의 큰 방향성만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결론을 여전히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보험료율 15%에 합의했다’, ‘기금고갈 시점이 앞당겨져 90년대생은 급여를 받지 못할 것이다’ 식의 허위사실이 언론을 통해 유포되기도 했다. 이윽고 2월 8일 연금특위 여야간사 및 민간자문위 공동위원장 회동 결과, 연금의 구조개혁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는 등 사실상 연금개혁을 원점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야합까지 발생하고 있다.
연금특위는 마지막 회의 이후 지금까지 두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문가들만 모여서 논의하게 만든 국회의 잘못이다. 연금개혁에 정말 책임을 질 마음이 있다면, 연금개혁에 대한 진심이 남아있다면, 국회는 한국노총의 우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과정 관리부터 다시 챙겨야 할 필요가 있다.
공적연금개혁은 더 높은 국민연금, 더 넓은 기초연금을 중심으로
한국노총은 요구안에서 현재 연금개혁의 주요쟁점이 되고 있는 영역별 사안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공적연금의 전반적 수준을 제고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45~50%까지 상향하고, 기초연금의 지급범위를 현행 소득하위 70%에서 보다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경제활동으로 오랜 기간 기여한 사람의 소득이 최소한 빈곤선을 넘어서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공적연금의 제1목적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연금으로 빈곤완화와 소득유지가 어느 정도는 가능해야 공적연금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보험료율의 단계적 조정 또한 검토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보험료율이 가령 15%까지 올라간다고 가정해보자. 2021년 기준 국민연금 가입자의 중위소득이 대략 270만원 정도 수준인데, 이 계층에 속한 가입자는 보험료율의 급격한 인상으로 기존 보험료보다 연 1,944,000원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이는 보험재정 확충에는 일부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개인(과 가구)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들어 소비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험료율이 대폭 올라가면 연금재정은 더 나아질지언정, 국민들은 가처분소득의 급격한 하락으로 삶의 수준이 저하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검토해 한국노총은 가계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소비위축이 발생하지 않는 수준에서 보험료율의 단계적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울러 보험료율 조정에 따라 국민연금기금의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경제적 영향 또한 충분히 고려해 스케줄을 짜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셋째,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 중의 하나가 국가 책임의 확대이다. 현재 우리나라 공적연금은 기초연금을 제외하고는 국가가 재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다.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는 각종 크레딧 제도가 운영되고는 있지만, 실제 적용을 받기엔 문턱이 높고, 필요한 재정을 추후 급여 지급할 때 정부에서 부담하겠다는 식이다. 현재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각종 크레딧 제도를 더욱 확대1)하고, 이에 대한 국고지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이 실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치들이 뒷받침되어야 국민들이 국민연금에 적극 가입할 유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퇴직급여의 기능 재정립, 특수직역연금의 기존 사회적 합의 이행 등에 대해서도 제시했다. 퇴직급여제도의 경우 1년 미만 계속근로기간 노동자에 대한 적용,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를 10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퇴직급여제도를 퇴직연금으로 일원화해 사외적립 강화 및 이에 대한 지원방안 검토 등을 포함했다. 특수직역연금의 경우에는 2015년 공무원연금개혁 재정절감분 일부를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에 활용 등 국민대타협기구의 최종합의문을 선제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와 함께 퇴직공무원의 연금소득공백 해소방안 마련이라든가 경찰·소방공무원의 정년 등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연금은 그 자체로 항상 복잡한 갈등 양상이 나타나는 제도이다.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지 않고 책임을 피하려 한다면 정치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사회주체로서 한국노총은 국회에 공적연금강화라는 사회적 요구를 제시했다. 국회는 이에 응답해 공적연금을 강화하는데 보다 자신들의 역사적 소명을 다해주기를, 국민의 보다 행복한 노후를 함께 그리는데 힘써주기를 요구한다.
<미주>
1) 출산 크레딧의 경우 첫째 자녀부터 즉시 지원, 군복무 크레딧의 경우 전체 군복무기간 인정 및 기준소득금액 A값 전액 적용, 실업크레딧의 경우 구직급여 수급기간 이외 기간도 추가로 산정하고 본인부담부문 추가지원,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 확대 등을 담았다.